[한국정경신문=박진희 기자] 일상에 깊숙하게 침투해 사용하고는 있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초고속 메모리가 SK하이닉스의 기술력으로 완성됐다. 제품을 세상에 내놓은 SK하이닉스는 고무적인 분위기다. 특히 이규제 부사장의 자신감은 ‘세계 1등’을 향해 있다.
SK하이닉스는 지난달 그래픽 처리는 물론 AI, 고성능 컴퓨팅, 자율주행 등 여러 분야에 활용할 수 있는 고성능 메모리를 세상에 내놨다. 세계 최고 수준의 성능이 구현된 차세대 그래픽 메모리 제품인 GDDR7을 공개한 것이다.
회사 측에 따르면 GDDR7은 이전 세대보다 60% 이상 빠른 32Gbps(초당 32기가비트)의 동작속도가 구현됐다. 제품은 사용 환경에 따라 최대 40Gbps까지 속도가 높아지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 제품은 최신 그래픽카드에 탑재돼 초당 1.5TB(테라바이트) 이상의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게 해준다. 이는 FHD(Full-HD)급 영화(5GB) 300편 분량의 데이터를 1초 만에 처리하는 수준이다. 빠른 속도를 내면서도 전력 효율은 이전 세대 대비 50% 이상 향상됐다.
현저한 속도 개선을 이뤄낸 데는 SK하이닉스의 신규 패키징 기술력 덕이다. 제품 개발 과정에서 초고속 데이터 처리에 따른 발열 문제를 해결해주는 신규 패키징기술은 회사 기술진에 의해 탄생했다. SK하이닉스 기술진은 제품 사이즈를 유지하면서 패키지에 적용하는 방열기판을 4개 층에서 6개 층으로 늘리는데 성공했다. 패키징 소재로 고방열 EMC를 적용했다. 이를 통해 기술진은 제품의 열 저항을 이전 세대보다 74% 줄이는데 성공했다. 회사 측은 이에 대해 10년이 넘긴 기간 동안 기술 전문가들의 영혼을 담은 ‘혁명의 산물’이라고 평가한다.
SK하이닉스는 5일 PKG제품개발 담당 이규제 부사장과 인터뷰를 자사 뉴스룸에 공개했다.
■ HBM 최초 개발이 초고속 성공으로..“성공신화 또 쓸 것”
SK하이닉스는 2013년 세계 최초로 개발한 1세대 HBM 제품에 TSV 기술을 적용했다. TSV는 여러 개의 D램 칩에 수천 개의 구멍을 뚫고 이를 수직 관통 전극으로 연결해 HBM의 초고속 성능을 구현해 주는 핵심 기술이다. 20여 년 전부터 기존 메모리의 성능 한계를 극복해 줄 차세대 기술로 주목받았지만 인프라 구축의 어려움과 투자비 회수 불확실성 등으로 선뜻 개발에 나서는 회사가 없었다.
당시를 이규제 부사장은 “커다란 호수 주변에서 누가 먼저 물에 뛰어들지 서로 눈치를 보며 기다리는 아이들과 같았다”고 회상했다.
이 부사장은 “SK하이닉스도 처음에는 망설이는 회사들 중 하나였다. 하지만 우리는 미래 시장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고성능과 고용량을 동시에 구현할 수 있는 TSV 기술과 적층(Stacking)을 포함한 WLP 기술을 동시에 확보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2000년대 초반부터 적극적인 연구에 들어갔다”라고 설명했다.
WLP(Wafer Level Packaging)란 웨이퍼를 칩 단위로 잘라 칩을 패키징하는 기존의 컨벤셔널 패키지에서 한 단계 발전한 방식이다. 웨이퍼 상(Wafer Level)에서 패키징을 마무리해 완제품을 만드는 기술을 말한다.
2010년대로 접어들며 고성능 GPU(그래픽 연산장치) 컴퓨팅 시장의 성장과 함께 이를 지원할 수 있는 고대역폭 니어 메모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시장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SK하이닉스는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TSV와 WLP 기술을 접목한 새로운 제품 개발에 착수했다. 마침내 기존 최고속 그래픽 D램 제품인 GDDR5보다 4배 이상 빠르며, 전력 소모량은 40% 낮고, 칩 적층을 통해 제품 면적을 획기적으로 줄인 최초의 HBM을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
SK하이닉스가 처음으로 HBM 시대를 열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시장이 열리고 회사가 주도권을 잡게 된 시점은 3세대 제품인 HBM2E 개발에 성공한 2019년이 되어서였다. 이때를 기점으로 SK하이닉스는 확실한 업계 우위를 점했다는 평가를 받게 됐다. 그러나 이 부사장은 성과를 이루기까지의 과정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다고 회상했다.
이 부사장은 “HBM을 최초로 개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어서 시장과 고객이 만족할 만한 수준 이상으로 품질과 양산 역량을 끌어 올려야 했다”면서 “이를 위해 소재 적용의 안정성, 기술 구현의 난이도 측면에서 기존 대비 더 우수할 것으로 예상되는 새로운 패키징 기술을 개발하게 되었다. 그런데 예기치 않게 초기 단계에서부터 신뢰성 확보에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라고 당시 어려움을 전했다.
이어 “그때 마침 회사에서 기술 로드맵에 따라 함께 개발하고 있던 MR-MUF 기술이 있었다. MR-MUF란 반도체 칩을 쌓아 올린 뒤 칩과 칩 사이 회로를 보호하기 위해 공간 사이에 액체 형태의 보호재를 주입하고, 굳히는 공정을 말한다. 칩을 하나씩 쌓을 때마다 필름형 소재를 깔아주는 방식 대비 공정이 효율적이다. 또한 열 방출에도 효과적이라는 평가 신속한 고객 대응을 위해 유관 부서의 리더들이 빠르게 기술 관련 데이터와 시뮬레이션 결과를 분석, MR-MUF의 안정성을 검증해 냈다. 경영진과 고객을 설득해 적기에 이 기술을 3세대 HBM2E에 적용할 수 있게 된 거다”라고 말했다.
이 부사장은 또 “개발진을 믿고 기다려준 경영진과 고객 덕분에 결국 당사 고유의 기술인 MR-MUF가 성공적으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며 “이를 통해 품질과 성능 측면에서 매우 안정적인 HBM2E의 양산과 공급이 가능해졌다”며 경영진에게 공을 돌렸다.
MR-MUF가 적용된 HBM2E는 HBM 시장의 판을 바꾸기 시작했다. 결국 MR-MUF는 SK하이닉스의 ‘HBM 성공신화’를 가능하게 만든 주역이 되었다.
회사는 지난해 4세대 12단 HBM3와 5세대 HBM3E 개발에 연이어 성공하며 독보적인 HBM 1등 리더십을 지켜오고 있다. 성공의 1등 공신은 MR-MUF 기술을 한 번 더 고도화한 ‘어드밴스드 MR-MUF’라고 이 부사장과 기술진은 첫손에 꼽는다. 어드밴스드 MR-MUF는 기존 칩 두께 대비 40% 얇은 칩을 휘어짐 없이 적층할 수 있는 칩 제어 기술이 적용된 차세대 MR-MUF 기술이다.
이 부사장은 “12단 HBM3부터는 기존보다 칩의 적층을 늘렸기 때문에, 방열 성능을 더욱 강화해야 했다. 특히 기존 MR-MUF 방식으로는 12단 HBM3의 더 얇아진 칩들이 휘어지는 현상 등을 다루기 쉽지 않았다”며 새로운 기술을 적용하면서 겪은 시행착오를 소개했다.
그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회사는 기존의 MR-MUF 기술을 개선한 어드밴스드 MR-MUF 기술을 개발했다. 이를 통해 지난해 세계 최초로 12단 HBM3 개발 및 양산에 성공했다. 이어 올해 3월 세계 최고 성능의 HBM3E를 양산하게 되었다”면서 “이 기술은 하반기부터 AI 빅테크 기업들에 공급될 12단 HBM3E에도 적용되고 있으며, 이후 활용 범위가 더 넓어지면서 SK하이닉스의 HBM 1등 기술력을 더 공고히 하는 데 힘이 되어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 미래 커스텀 제품 개발을 위한 차세대 기술력과 고객 파트너십 강화
이렇게 오랜 기간에 걸쳐 이루어낸 HBM 개발 공적으로 이 부사장은 지난 6월 회사의 HBM 핵심 기술진과 함께 SK그룹 최고 영예인 ‘2024 SUPEX추구대상’을 수상했다.
이 부사장은 안주하지 않고 앞으로도 SK하이닉스가 HBM 리더십을 지켜가려면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커스텀 제품 요구에 적기 대응하기 위해 다양한 차세대 패키징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표준 규격에 따라 제품 두께는 유지하면서도 성능과 용량을 높이기 위한 칩 고단 적층의 방편으로 최근 하이브리드 본딩 등 차세대 패키징 기술이 주목받고 있다”면서 “위 아래 칩간 간격이 좁아져 생기는 발열 문제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지만 점점 더 다양해지는 고객의 성능 요구를 충족시킬 솔루션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면서 미래를 바라봤다.
이어 “SK하이닉스도 방열 성능이 우수한 기존 어드밴스드 MR-MUF를 지속적으로 고도화하는 한편, 새로운 기술들을 확보해 나갈 계획”이라고 전했다.
이 부사장은 고객과의 긴밀한 소통과 협업이야말로 SK하이닉스의 저력이자 앞으로도 계속 강화해야 할 경쟁력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SK하이닉스가 HBM 시장을 선점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품질과 양산 경쟁력을 갖춘 제품을 고객이 원하는 시기에 제공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기술력 확보는 물론 고객과의 지속적인 소통 덕분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말한다.
이를 위해 “패키징 개발 조직에서도 고객과 이해관계자의 니즈(Needs)를 빠르게 파악해 제품 특성에 반영하고 있다”면서 “이러한 노력에 회사 고유의 협업 문화를 더한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나 역시 제 모토인 ‘Feel Together, Move Vigilantly(함께 느끼고, 기민하게 대응하자)’를 구성원들과 공유하며 SK하이닉스 패키징의 미래를 준비해 나가겠다”고 말하며 인터뷰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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