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엔 한강을 가야 한다.
누군가에겐 시작이겠지만 누군가에겐 작별이겠거니,
갯가에 피는 꽃을 부러워 마라. 네가 찾기 전에 봄은 왔고 꽃은 피었으니
흐르지도 멈추지도 않는 강물을 읽었으면 하늘을 보라.
그러니 바람부는 봄날에 우리는 강가에 가야한다.
저녁 강이라면 더욱 좋겠다.
강원도 어디쯤이었을까? 언제였을까? 고단한 유영을 멈춘 홑씨는
네가 아니어도 좋다. 이파리 피고 지면 또 하나의 겨울을 보내고
강과 흙이 맞닿은 곳에서 또다시 잊혀져 간다.
그러니 바람부는 봄날에 우리는 강가에 가야한다.
먹구름 얹힌 강이라도 상관 말자.
하늘의 고요가 조각나면 봄바람이 시리다는 것을 알겠으랴.
너울에 눈그림 싣는다고 등짐 비우는 것은 아니리니
사랑을 알았다고 말하지 마라. 꺽이는 게 사랑인 것을
강물은 말한다. 이왕 떠날 거면 꽃단장에 새 옷을 입고 가라고."
그렇다. 봄날엔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 겨우내 삭히고 쌓아 놓은 흔적을 털어 내고 강물을 맞고보내는 의식을 치뤄야 한다.
봄날엔 떠나야 한다. 겨우내 말라 비틀어진 건조한 영혼을 끌어내 떠나야 한다.
헤진 신발 창 사이로 음습한 땅기운이 올라와도 떠나야 한다. 영혼의 순백성이 묻혀있는 황무지를 찾아 떠나야 한다. 이성과 논리, 관념과 부조리가 머리를 어지럽혀도 삽을 메고 떠나야 한다.
한삽 한 삽 잃어버린 순수를 캐야 한다. 떠남은 곧 순수의 회복이다. 상징이다. 상징은 신념과 질서의 붕괴다. 곧 자유로 대치된다. 아름답다고 한다. 아름답기에 혼란으로 팽팽하게 긴장한 신경계가 '툭'하고 끊어진다.
봄날의 고갱이를 맛보려면 그래서 떠나야 한다.
“짙은 여름 저녁이면 푸른 오솔길을 헤치고 나아갈 것이다.
따갑게 와닿은 밀밭을 헤치고
자라는 풀들을 밟으며 꿈길처럼
발아래 닿은 시원한 감촉을느낀다.
바람이 나의 머리칼을 씻어낸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것이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나의 영혼을 아름답게 물들인다
그리움으로 눈가를 적신다.
집시처럼,
여인의 젖가슴 같은 산길 사이를 가로질러 나아간다
마치 어느 여인과 사랑에 빠진 것 처럼 행복하게”
(아르튀르 랭보)
맞다. 우리는 각자 고통을, 절망을 예언해야 한다. 바위틈 복수초에 눈이 멀어 선홍빛 철쭉에 취했던 어리석음을 탓해야 한다. 진달래 흐드러진 산기슭에는 문둥이의 한이 서려있고 12살 소년의 꿈을 수갑채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원죄가 묻혀있는 게 이런 봄날이다.
지난 여름의 가장된 성장(盛裝)이 몰아친 고통을 잠시 내려 놓은, 메마른 생명마저 비켜나가지 못하는 절망의 계절이 봄날이다. 억지로 가지를 일으켜 푸른 잎을 달아주지만 천둥과 폭풍우를온전히 담아내야만 하는 숙명을 예정한다. 절망을 되풀하는 봄날이다.
철학이 삼켜버린 태고의 숨소리를 찾아 나서야 한다. 원시는 문명의 어머니였다. 덧칠한 합리와 자유는 불행의 씨앗이었다. 피투성으로서의 원초적 텍스트는 애시 당초 가당치 않은 것이었다. 시대적 소명은 환멸과 가식으로 경위(經緯)를 짠 민초들의 희망에 지나지 않았다.
누가 황무지를 희망이라고 노래했던가? 황무지가 잉태한 생명은 고통이라는 거푸집에 갇힌다.
누가 봄을 생명의 계절이라 했던가?
2023년의 봄날은 그렇게 간다.
대한민국의 속살이 뭉그러진다.
그래서 봄날엔 취해야 한다. 술이든 풍경이든 여행이든. 취하지 않으면 한걸음 내딛기가 위태롭다. 서울 광화문에서는 취하지 않으면 미치광이가 된다. 취해야 하루를 넘길 수 있다. 따라서 취한다는 것은 집중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너는 네가 아니고 나는 내가 아닌 것이 된다. 역사의 또다른 얼굴이다. 해방 이후 매년 되풀이되는 한국의 봄이다. 취한 시간은 바로 집중하는 시간이다. 물 흐르듯 흘러가는, 바람처럼 불어오는 시간이 아니다. 초단위로 분단위로 분할되어 있는 시간, 시간 자체가 무언가를 계속해서 쫓고 있는 시간이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시간을 압박하고 압박을 받는다. 압박하기에 우리는 없고 압박이 끝나면 우리도 끝난다. 2023년 대한민국, 끊임없이 취한다.
"언제나 취해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이 거기에 있다. 그것이 유일한 문제다. 그대의 어깨를 짓누르고, 땅을 향해 그대 몸을 구부러뜨리는 저 시간의 무서운 짐을 느끼지 않으려면, 쉴새없이 취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에? 술에, 시에 혹은 미덕에, 무엇에나 그대 좋을 대로, 아무튼 취하라.
그리하여 때때로, 궁전의 섬들 위에서, 도랑의 푸른 풀 위에서, 그대의 방의 침울한 고독 속에서, 그대 깨어 일어나, 취기가 벌써 줄어들거나 사라지거든, 물어보라. 바람에, 물결에, 별에, 새에, 시계에, 달아나는 모든 것에, 울부짖는 모든 것에, 흘러가는 모든 것에, 노래하는 모든 것에, 말하는 모든 것에, 물어보라, 지금이 몇 시인지, 그러면 바람이, 물결이, 별이, 새가, 시계가, 그대에게 대답하리라."
“지금은 취할 시간! 시간의 학대받는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취하라, 끊임없이 취하라, 끊임없이 취하라! 술에, 시에 혹은 미덕에, 그대 좋을 대로.”
(보들레르)
보도블럭 틈사이를 비집고 올라온 봄 질경이에게서 생명을 느끼고 희망을 노래한다. 이마저 없었으면, 이들의 투쟁이 아니었으면, 얼마나 삭막한 세상이냐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러나 그 것이 위선이었고 앞선 자들의 자기 방어기제였음을 아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결국 그들의 유희였고, 그들의 떠들썩한 봄 맞이 이벤트였다. 전설에는 잔치였다고 한다. 봄의 칼날이 살갗을 예리하게 파헤쳐 들어 상처기를 내자 민초들은 열광했고, 결국 제단의 무희들은 또 하나의 권력이 되어 하늘로 올랐다. 그렇기에 봄의 시작은 잔인했다. 민초들의 후회는 눈물이 되어 흐르는데, '세상이 좋아졌다'는 노래는 라디오를 타고 흘러나온다. 그들만의 리그에 구경꾼으로 전락한 옛 혁명전사들은 오늘도 한강을 찾는다. 한강의 봄은 턱밑을 간지르며 춤추고 노는데.
에라 빙고!
오늘은 일찍 퇴근해 한강의 갯벌을 찾아야 겠다. 갯지렁이라도 만나면 진흙집이라도 지어주게. 혹시 누가 알랴? 강원도 어디쯤에선가 실려온 들꽃이라도 만날지.
<필자 소개>
-현 (주)SH네츄럴 회장
-전 동아일보 모스크바특파원, 산업부장, 부국장, 미래전략연구소장
-전 채널A 경영전략본부장, 글로벌사업센터장
-전 에너지경제신문사장, 아주경제신문부문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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