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점심을 가까운 선배와 했다. 그는 자리에 앉자 마자 방금 전 참석했던 3ㆍ1절 기념식 얘기를 꺼냈다.
조부가 광복군 창설을 주도했던 임정 요인 중 한 분이라 후손으로서 매년 기념식에 참석해왔는데, 올해는 좀 특별했다고 했다.
첫째, 대통령 기념사가 5분 남짓으로 지극히 짧았고, 둘째, 일본을 겨냥해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요구했던 역대 대통령과는 달리 일본에 대해 ‘협력 파트너’라는 표현을 썼다는 것이다.
순간 전언(傳言)이었음에도 머리를 얻어 맞은 듯 잠시 혼란스러웠다.
‘협력 파트너’.
대통령이, 그 것도 현직 대통령이 3ㆍ1절 행사에서 공개적으로 이 말을 했단다. 처음엔 어지러웠고, 그 다음엔 놀랐다.
나는 사실이냐고 거듭 물었고, 휴대전화로 바로 검색을 했다. 분명히 ‘협력 파트너’라고 돼 있었다.
정확한 워딩은 “3·1운동 이후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일본은 과거의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안보와 경제, 글로벌 어젠다에서 협력하는 파트너로 변했다”였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어 “영광의 역사든, 부끄럽고 슬픈 역사든 잊지 말아야 한다”면서 “헌신한 선열들을 기억하고 우리 역사의 불행한 과거를 되새기는 한편, 미래 번영을 위해 할 일을 생각해야 하는 날이 바로 오늘”이라고도 했다.
쉽게 풀어 말하면, 한일 양국이 과거사를 잊지 않되 강제징용 문제 등으로 가로막힌 관계를 정상화해야 하며, 이를 위해 양측 모두 성의 있는 조치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자유·평화·번영·미래라는 가치를 목표로 건강하고 정상적인 관계를 양국이 만들어 나가자라는 주문이다.
3ㆍ1절 기념식은 과거 대통령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정치의 장(場)이었다.
대통령 취임 후 처음 맞는 기념식이라면 더욱 그랬다. 말로서 일본에 날카롭게 날을 세우는 것 만으로도 역사의 원한(怨恨)과 분노를 일깨웠고, 범국민적 지지를 이끌어 냈다. 반일(反日)은 민생고나 경제난 등 골치 아픈 국내 문제를 일시에 잠재우는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가해자’ ‘반인륜적 인권 범죄’ 같은 용어를 구사해가며 일본의 반성과 사죄를 촉구했다. 박근혜 대통령도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역사적 입장은 천년의 역사가 흘러도 변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명박 대통령 역시 “역사의 진실을 외면하면 안된다”고 일본 책임론을 공론화했다.
대통령들의 이런 직설적인 3ㆍ1절 발언에 국민들은 시원해 했고 통쾌해 했다.
반면 풀려나갈 조짐을 보이던 힌일관계는 이런 대통령들의 발언 후 더욱 꼬여 갔고, 일본의 태도 또한 오히려 경직되는 악순환이 되풀이 됐다.
특히 문재인 전 대통령이 주도한 반일(反日) 프로파간다는 약효가 넘치고 넘쳐 극에 달했다. 김대중정부에 이어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정부를 거치며 봉합했던 과거사 문제들을 다시 헤집어 불필요한 외교 갈등을 자초했고, ‘노 저팬’ ‘죽창가’ ‘쪽바리 첩자’ ‘친일파 후손’ 같은 반일 선동을 부추겼다.
문 전 대통령의 무책임한 정치 선동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자 여의도 정치판(정치꾼)은 한술 더 떴다. 여야 가릴 것 없이 국회의원 뱃지를 단 사람이나 정치하겠다고 나선 인사들 치고 반일(反日) 장사를 하지 않은 경우가 드물었다. 정치공학적 측면에서 실(失)보다는 득(得)이 많다는 판단에서였다.
국익을 위해선 미국의 동맹이자 자유·시장경제 체제인 일본과의 협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본 때리기에 앞장 섰다. 일본에 미래지향적이거나 적극적 자세를 조금이라도 보이는 정치인이 눈에 띄면 즉각 ‘친일파’ ‘토착 왜구’라는 시대착오적 인신 공격을 퍼부었다. 해방 후 두 세대가 훨씬 지난 지금 세상에 일본에 나라 팔아먹는 친일파가 어디 있겠냐 마는 이들에게는 사실여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잔혹하고도 치욕스러운 식민지 지배를 경험했다. 잊을 수가 없고, 결코 잊어서도 안되는 과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는 서로의 필요에 의해 경제·외교·문화 등 전 방위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어올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최근들어 김정은의 핵 위협이 고조되고 한·미·일의 안보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지면서 양국의 협력관계는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김정은(북)-시진핑(중)-푸틴(러)의 독재체제 vs 한미일유럽의 자유민주주의체제’라는 신 냉전 대결구도 역시 우리에게 선택지를 제한 하고 있다. 일본과의 관계는 싫어도 가야 하는 길인 것이다.
이런 국제정치 상황이 아니어도 대한민국은 성숙했고 자신감도 갖췄다.
이미 특정 분야에서는 일본을 넘어섰다. 예를 들어 반도체·스마트폰 등의 IT 산업이나 조선·2차전지(배터리)·석유화학 등의 제조업 분야는 한국이 일본을 훨씬 앞지르고 있다. 블랙핑크와 BTS, 영화, 드라마, 게임, 웹툰 등의 K컬처는 일본의 문화 산업을 압도하고 있다. 심지어 일본의 국민 메신저라는 ‘라인’도 한국의 네이버 산(産)이다.
양국의 미래도 밝다. 한·일의 청년(MZ)세대들은 이미 상대 국가에 대한 우호적이고 긍정적인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다. 잇따른 여론조사가 이를 반증한다.
방문객 숫자 또한 마찬가지다. 코로나 사태 이전인 2019년 일본을 찾은 한국인 관광객은 558만명이었고, 한국을 찾은 일본인 관광객은 327만명이었다. 하지만 최근 코로나가 해제되자 ‘대한민국 도쿄시’ ‘경기도 큐슈시’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일본을 찾는 한국인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한국을 찾는 일본인의 증가도 비슷한 추세다.
이런 여러 상황을 감안할 때 정치인들은 신중해져야 한다. 지지세력을 결집시키기 위한 무책임한 정치적 선동은 삼가해 한다. 오히려 나라가 과연 어떻게 하면 공존과 번영을 함께 이끌어나갈 수 있는 가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 일본을 두들겨 패는 방식으로 정치적 이익을 얻고자 하는 협량(狹量)한 관성을 버려야 한다. 국익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점에서 윤석렬 대통령의 이번 3ㆍ1절 기념사를 높이 평가하고 싶다.
이제 공은 일본측으로 다시 넘어 갔다.
강제징용, 위안부,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수출 규제, 일본 군사 대국화에 대한 우려 등은 가해자로서, 또 원인 제공자로서 일본은 향적 자세를 보여야 한다. 특히 장 민감한 이슈인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에 대해서도 유연한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사과와 반성도 솔직하고 진정성 있게, 보상의 규모와 절차 역시 상식 차원에서 납득할 만한 수준이 돼야 한다.
그게 윤석열 대통령의 결단에 화답하는 것임을 일본정부는 명심해야 한다.
<반병희 논설고문 (현 (주) SH네츄럴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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