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병희의 그림이 있는 풍경] 의식(儀式)의 자화상-우리는 매일 제사를 지낸다

반병희 논설고문 승인 2023.02.22 08:38 의견 0
사진=반병희

잘 있어요. /네, 안녕히 가세요.

또 만나요. /네, 다음에 뵈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기에 여지를 남긴다. 잘 지내라고.

다시 보자는 약속도 한다. 공허를 조금이라도 채울 수 있을까 봐.

늘 태양이 빛나고 눈 앞에 무지개가 뜬다면 굳이 다시 만나자고 언약하지 않아도 될 것을.

내일은 설레임도, 결코 낭만적이지만도 않다는 것을 알기에 지금 이 순간을 붙잡고 싶다. 시간을 소유할 수 있다면 한결 여유롭겠지만.

우리는 매일 의식(儀式)을 치룬다.

다음을 알 수 없는 불안에서다. 너와 함께하는 지금이 마지막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다. 너를 떠나 혼자 남겨질 수 있다는 고통때문이다.

늘 작별 연습을 한다. 안부(安否)를 묻고 안부를 전한다. 헤어짐의 인사말이 “다녀 올께”인 것도 돌아오지 못할 수 있음을 전제한다. 출근이나 출장처럼 일상의 가벼운 떠남조차도 다음을 확신하지 못한다.

이별이 통속 드라마를 성립시키듯이 작별 의식은 하루 24시간을 지배한다.

너와 나의 연결을 끊어내는 아픔에라도 이르면 의식(儀式)은 장엄해 진다. 떠나는 이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다. 함께 보낸 시간을 기억하는 나 자신에 대한 위로다.

우리가 매일 제사(祭祀)를 지내는 이유다.

꽃 상여가 나갈 때 나는 뒷 광으로 숨었다. 동네 골목을 한바퀴 돈 상여꾼들의 요령소리가 담장너머 가까워지면 나는 빈 항아리에 들어가 웅크려 앉았다. 붉고 흰 만장 행렬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가던 길을 돌아 무작정 달렸다. 상여소리에 귀를 막으며.

초상집 근처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동네 어귀 언덕 아래 곳집은 무조건 에둘러 갔다.

희한하게도 만가(輓歌)만큼은 입에 달라붙었다. 만가라도 온전히 불러줘야 죽은 이가 이 생에서 털없이 떠날 갈 것 같았다. 애들과 놀다가, 길을 걷다가, 들판에 심부름을 나가다가 실성한 놈 처럼 혼자 웅얼거렸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북망산천 멀다드니 앞산이 북망이라. 어~어이야, 어~어이야. 삼천갑자 동방삭은 삼천년도 더 살았고, 이네 인생 불쌍한 인생은 한백년도 못 살았네. 어~어 어이야. 어~어어이야. 구름도 쉬어 넘고 날짐승도 쉬어 가는 심산유곡을 어이 갈까.”

이후 나는 죽음에 신성했다. 최고의 의식이었다.

어머니 영향도 있었지만, 나에게 죽음에의 의식은 태생적 기질이었고 종교적인 그 무엇이었다.

죽은 새를 묻어줘야 길을 갈 수 있었고, 저녁상을 위해 물고기 잡는 것 조차 저어했다.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필부필부이건 고관대작 출신이건, 외국인이든 한국인이든 죽음을 만나면 차에서 내려 마지막 길 인사를 했다.

저 마다 우주를 갖고 있었고 온전한 생명을 갖고 있었던 것에 대한 경의였다.

둘러보면,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매일 의식을 준비하고, 의식을 치르며, 또 다른 의식을 만들어낸다.

지독한 상실감과 외로움을 느끼고 있는 우리는 우리가 아직도 살아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매일 반복되는 일상 각각에 의미를 부여한다. 마침내 의식(儀式)은 종교화돼 신앙의 단계까지 끌어 올려진다. 출근 후 자리 앉기 전 책상을 깨끗하게 훔쳐내는 행위, 직장 동료와의 맛집 순례, 퇴근 때 헬스클럽에서 땀흘리기 등 사소한 짓거리에서 영화보기, 책읽기에 이르기까지 하루 일과에 영혼을 불어 넣는다. 이는 곧 토템이 된다.

영어 학원, 댄스 학원, 야간 마라톤클럽, 사이클 클럽 등을 순례하는 것도 내면을 들여다 보면 단절에 따른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한 토템이다. 커뮤니티라는 작은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 자신을 감추고 싶어 한다. 사회적 단절의 고통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자기보호의 본능적 기제의 작동이다.

실제 현실은?

자신을 위한 시간이 점점 사라진다. 자신 밖의 또 다른 자신을 만들어내기에 바쁘다. 지하철을 기다리면서, 심지어 횡단보도를 건널 때 조차 휴대전화를 들여다 본다. 업무시간이나 손님과의 식사 중에도 문자 메시지를 확인한다. 뭔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은 생각이 드는 데도, 자신에게는 중요하다고 습관화가 된 의식(儀式)때문에 스스로를 바쁜 사람으로 여긴다. 자연히 자신의 내적 삶이나 감정을 느끼고 인식하는 것조차 건너 뛴다. 심지어 자신이 화나고 분노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 채 많은 날을 보낸다. 가슴을 짓누르던 걱정거리가 끝날 때까지도 열흘 내내 자신이 초조해 했다는 사실을 인지 하지 못한다. 의식의 과잉이자 결핍이다.

그래서 현실은.

끊임없이 서로를 찾는다. 함께 하는 자리를 만들려는 몸부림이다. 결국 공동체다. 수천년 동안 인류는 함께 식사를 했다. 같은 자리에서 음식을 나눠 먹었다. 처음에는 생물학적 필요성 때문에 채집과 사냥의 전리품을 나눠 먹었고, 나중에는 연대감을 보여주기 위해, 더 나중에는 종교적 차원에서 자리를 함께 했다. 같은 음식그릇을 공유하면 잠재적 경쟁자들끼리 서로를 독살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서다. 시크교의 ‘랑가르’, 이슬람교의 ‘이프타르’, 일본의 불교식 ‘다도’, 기독교의 ‘성찬식’도 마찬가지 성격이다.

사회적 관계의 의식(儀式)화이고 일상화다. 이런 의식화는 우리를 일상에서 벗어나 소속감과 연대감을 전제로 더욱 깊은 공동체로 끌어들인다. 그들과의 공존은 또 하나의 토템을 탄생시킨다. 함께 하는 식사 대신에 오프라인 온라인 구별없이 ‘커뮤니티’라는 게 그 역할을 대체한다.

요체는 개인의 탈중심화다. 자신을 자신에서 벗어나게 해 자신과 연결된 더 큰 집단에 소속시키려 한다. 고립에 따른 소외감은 사라지고 어느 덧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안도감을 갖는다. 의식(儀式)이 주는 마취 효과다. 의식(儀式)의 집단화다.

거리의 분향소는 의식의 단계를 한 차원 끌어올리기에는 최적이다. 집에서 지내던 제사가 광화문 광장으로, 서울시청 광장으로 나온 이유도 단순하다. 너를 통해 나의 단절을 회피할 수 있어서다. 파편화된 개인으로서는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는 현실에 대한 좌절때문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와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두려워한다. 특별해지기를 원하면서도 자신에게 요구되는 규율과 헌신에는 주저한다. 구성원으로서 책임에는 부담을 느끼지만 뭔가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알리고 싶다.

따라서 정의, 가치, 윤리, 도덕, 인류애, 질서 등은 결코 개인으로서, 집단으로서 의식(儀式)을 집행할 때 중요한 요소가 되지 못한다. 될 수도 없다. 경우에 따라 성가시기까지 하다. 의식은 의식 자체만으로도 숭고하다며 신앙의 대상으로 승화시킨다. 집에서 뛰쳐 나오기에 거리는 좋은 안성맞춤이다.

이쯤 되면 의식은 의식을 위해 존재하는 객체로 전환된다. 죽음은 빠진 채 객체가 주체가 된다. 본말의 전도다. 의식의 혼란이다.

광장에서 향을 피우며 의식을 치루고 있는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필자 소개>

-현 (주)SH네츄럴 회장

-전 동아일보 모스크바특파원, 산업부장, 부국장, 미래전략연구소장

-전 채널A 경영전략본부장, 글로벌사업센터장

-전 에너지경제신문사장, 아주경제신문부문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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