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경신문=박진희 기자] ㈜영풍이 ㈜고려아연의 경영권 분쟁으로 시작된 갈등이 깊어지는 양상이다. 고려아연은 영풍과의 거래를 거절했다. 영풍은 고려아연을 상대로 불공정거래행위 예방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영풍은 지난달 20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 고려아연을 상대로 황산취급대행계약의 갱신 거절에 관해 불공정거래행위 예방청구 소송을 제기했다고 3일 밝혔다. 그 보전 처분인 거래거절금지 가처분을 제기는 2일 했다.
이번 소송은 영풍과 고려아연 사이에서 장기간 지속되어온 황산취급대행계약의 갱신을 둘러싼 이견으로 인한 것이다. 지난 20년 동안 이루어져 온 거래 갱신은 올해 고려아연이 영풍에 일방적으로 거절하고 계약 종료를 통보한 것이다. 영풍은 이에 대한 대응차원에서 법적 대응에 나섰다.
문제는 황산 처리를 두고 빚어졌다. 황산은 아연을 제련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생성되는 부산물로 이를 제때 처리하지 못하면 아연 생산에 큰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
영풍은 고려아연의 거래거절 선언에 대해 수차례 내용증명 등을 통해 자사의 대체설비 마련을 위한 모든 노력을 다하더라도 단기간에 이루어질 수 없고 최소한 7년 내외가 소요될 정도의 어려움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1년 단위로 갱신돼 온 황산취급대행 계약을 우선 1년간 연장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고려아연은 이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고려아연의 제반사정상 ‘최대 3개월’까지만 잠정적으로 일부 황산취급대행 업무를 제공하겠다고 일방 통보했다. 이로 인해 영풍의 황산 수출은 차질이 불가피한 실정이다.
영풍 그룹의 계열사인 영풍과 고려아연은 모두 아연 제련 업체다. 2000년 이후 각각의 아연 제련 공정에서 생산되는 황산의 대부분을 온산항(울산항)을 통해 수출해 왔다. 영풍은 경북 봉화군 석포면에 자리 잡은 제련소에서 만들어진 황산을 온산항으로 수송하는 과정에서 고려아연 온산제련소의 황산 탱크 및 파이프라인을 유상으로 이용해왔다.
이를 ‘황산취급대행’이라고 한다. 이 계약 관계는 1년 단위로 갱신되면서 지난 20년간 이견 없이 유지돼 왔다. 하지만 고려아연은 20년 넘게 유지해온 황산취급대행계약 기한(6월 30일)을 2개월 남겨둔 지난 4월, 영풍을 상대로 계약의 갱신을 거절한다고 통지했다.
국내 수요가 적어 대부분을 수출해야 하는 황산은 동해안에는 동해항과 온산항에서만 수출 선적이 가능하다. 동해항은 이미 포화 상태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려아연의 황산취급대행의 거절로 온산항을 사용할 수 없게 되면 영풍은 황산을 수출할 수 없어 아연생산에 차질을 받게 된다.
고려아연은 계약 갱신 거절의 사유로 ‘ESG 이슈, 시설노후화, 고려아연의 황산 물량 증가’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영풍은 거절 사유 어느 것도 계약을 즉시 중단해야 할 이유가 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영풍과 고려아연의 계약은 황산 제조 공정에 관한 것이 아니라, 고려아연의 기존 저장탱크 2기와 기존 황산 파이프라인 일부를 공동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 부분이 고려아연에 큰 부담을 주는 것이 전혀 아니기라는 게 영풍 입장이다.
업계에서는 고려아연의 급작스러운 태도 변화의 진짜 이유로 경영권 분쟁을 꼽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고려아연은 2022년 일련의 유상증자와 한화·LG화학과의 자사주 교환 등을 추진하며 우호지분을 확보했다. 이 때문에 영풍과의 경영권분쟁이 시작됐다.
영풍이 지난 3월 고려아연 정기주주총회에서 제3자 배정 유상증자 정관 개정에 반기를 들었다. 같은 달 고려아연이 현대자동차 해외 계열사인 HMG글로벌에 발행한 신주발행에 대해 ‘신주발행무효소송’을 제기하자 고려아연은 이를 빌미로 영풍을 상대로 적대적 행동을 개시했다.
고려아연은 영풍을 ‘경쟁자’로 지목하며 동시다발적으로 원료공동구매 중단, 공동영업 중단, 서린상사 경영권 장악 등을 진행했다. 일련의 사건이 황산취급대행에 대한 일방적인 거절을 선언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영풍이 황산처리 시설을 자체적으로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이에 대해 영풍은 2000년부터 약 20년 이상 동해항에 수출설비를 마련하는 등 황산을 자체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왔다고 밝혔다. 그러나 대안 마련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동해안에 황산 수출이 가능한 케미컬 항구는 동해항과 온산항 두 곳이다. 영풍은 동해항에 자체 수출설비를 마련했으나, 동해항은 규모가 작고 수심도 낮아 대규모 선적이 불가능한 관계로 더 이상의 확장은 한계라는 이유다.
반면 온산항은 태생부터 정부의 대규모 중화학 공업 육성 정책에 따라 온산국가산단 내에 설립된 황산 수출에 최적화된 항구다. 영풍그룹이 경영권 분쟁 이전에 영풍과 고려아연의 황산 수출 창구를 온산항으로 단일화한 이유기도 하다.
비철금속업계에서도 영풍이 단기간 내에 온산항을 대체하는 황산수출시설을 갖추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국가적 차원에서도 적절하지 않다는 의견이다. 영풍이 생산하는 대규모 황산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다른 지역에 새롭게 황산 수출을 위한 시설과 인프라를 구축해야 하는데 부지 확보부터 설계, 완공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이마저도 주민 반대 등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국가적 차원에서도 온산항(울산항)을 액체화물 처리 전문 항구로 꾸준히 지원하고 있는 만큼 온산항을 통해 대규모 황산을 수출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것이다.
국내 아연 판매 시장에서 2위 사업자인 영풍은 2023년 기준 33.1만 톤의 아연을 생산해왔다. 그 중 15.3만 톤을 내수로 공급하고 17.8만 톤을 수출했다. 만일 고려아연이 황산취급대행계약 갱신을 거절한다면 영풍은 아연 생산에 차질을 받게 되고 이로 인해 국내 아연 공급망에 큰 혼란이 초래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지역경제에 불안을 조성하고, 비철금속 제련이라는 국가 기간산업 발전에도 큰 부담을 주는 결과로 이어질 것으로 우려된다.
이에 대해 고려아연은 ‘내수 공급 부족 사태를 막기 위해 생산제품의 판매 우선순위를 국내에 두겠다’는 입장이다. 이미 국내 점유율 56%의 압도적인 1위 사업자인 고려아연의 주장은 국내 아연 판매 시장을 독점하겠다는 선포와 다름없다. 고려아연의 황산취급대행계약 갱신 거절은 결코 영풍의 불이익에 그치지 않는 것이다.
공정거래법은 이처럼 일방이 의존적인 상황에서 우월한 거래상 지위를 이용해 사업 활동을 곤란하게 할 목적으로 하는 거래거절, 이른바 ‘갑질’을 부당한 거래거절 내지 사업활동방해, 불이익제공행위로 보아 엄격히 규제하고 있다. 영풍은 고려아연의 일방적인 거래거절이 공정거래법에 위반한다고 보고 있으며, 이를 근거로 법적 대응에 나선 것이다.
영풍은 “소송에서 고려아연의 거래거절이 부당함을 밝히고 대체설비 마련의 어려움을 설명하면서 아연제련에 필수적인 황산수출설비의 공동사용 거부가 위법함을 밝혀 낼 것”이라며 “고려아연이 지금이라도 황산수출대행 계약의 거절을 철회하고 합리적인 협의의 장에 나오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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