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성 칼럼] 양승태 원장의 높은 자존심 낮은 책임감

법은 스스로 지키는 자존만을 지켜준다. 양승태 전 원장의 검찰출석을 보며

김재성 주필 승인 2019.01.16 20:18 | 최종 수정 2019.03.27 12:57 의견 9

[한국정경신문 김재성 주필]사상 최초로 전직 사법부 수장으로 검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방어 무기는 “기억이 없다” “실무자가 한 일이라 나는 모른다.”였다. 

양 전 대법원장은 직권남용 등 무려 20개 항목의 혐의를 받고 있다. 대표적인 혐의는 대법원장 재임 중(2011~2017) 박근혜정부의 청와대 요구대로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민사소송을 지연시키는 대가로 상고법원 도입을 얻어내려 했다는 ‘재판거래’ 의혹과 특정성향 판사들을 선별해 인사 상 불이익을 주는 ‘판사 블랙리스트’ 작성이다.

양 전 원장이 “기억이 안 난다.”고 하는 부분은 일제강점기 징용피해자 유족들이 낸 미쓰비씨 등 일, 전범기업들을 상대로 낸 민사소송의 일본 기업의 변론을 맡고 있는 ‘김&장’ 소속 변호사를 만났는지 여부다. 

검찰은 그가 ‘김&장’ 측 변호사를 세 차례 만나 재판진행을 협의했으며 이미 구속된 임종헌 전 법원 행정처 차장을 통해 외교부로 하여금 이 재판이 한일 외교에 미칠 악영향에 관한 의견서를 내도록 조언했다는 데 혐의를 두고 있다. 

‘기억이 안 난다’는 일반적인 해석은 만났는데 기억이 안 날수도 있고 만나지 않았으므로 기억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법률적으로는 다른 물증이 없으면 피의자에게 유리하게 적용된다. 따라서 ‘기억이 안난다’ 함은 ‘만나지 않았다’는 효과를 노리는 것이다. 
그럴 바에야 정식으로 부인하지 왜 기억에다 기대는가? 만약 물증이 나오면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을 면하기 위한 절묘한 꼼수다.

‘기억이 안 난다’는 궁색한 증언은 88년 국회 5공 청문회에서 처음 등장해 법률용어처럼 되었다. 평민, 민주, 공화, 야 3당이 주도한 국회 5공 청문회는 전두환의 5공화국 비리와 80년 5월 광주 민중항쟁 당시 군인들이 벌인 무차별 살상의 경위를 공개적으로 듣는 자리였다. 
이 청문회에서 한 때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로 위세 당당했던 정치군인들이 결정적인 대목에 이르면 장 모 한 사람 말고는 하나같이 “기억이 안 난다”로 얼버무렸다. 이 때 회자된 단어가 ‘X 별’, 난처한 질문이 나오면 기억 상실증 환자마냥 눈만 깜박거리는 궁색한 모습을 지켜본 시청자들이 “저런 ‘X 별’들이 한 때 나라를 좌지우지 했던가.”라며 자탄한데서 생겨난 말이다.  

역사의식을 갖고 산 사람들은 말이 구차하지 않다. 김구 선생 안중근 의사 이봉창 윤봉길 열사 등 독립지사들은 말 할 것도 없고 함석헌 안병무 문익환 백기완 등 민주화 선구자들도 했으면 ‘했다’ 안 했으면 ‘안 했다’ 그리고 했으면 그 정당한 이유를 당당하게 설파했지 법률적 유, 불리를 계교하면서 말하지 않았다. 어른들이 그러니 뒤를 따르는 학생들도 당연히 그랬다. 얼마나 명쾌하고 정연했으면 감옥 안에서 수기로 쓴 유시민의 상고이유서를 판사들이 돌려가면서 읽었다지 않는가? 

자기 소신이 있는 사람은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기억을 못할 만큼 무책임하지 않다. 더구나 히로시마 나가사끼 원폭으로 죽은 사람이 1만 명, 어림잡아 150여만 피해자가 일본 전범기업을 상대로 낸 민사소송을 다루는 대법원 수장이 일본기업 측 법정대리인을 만났다는 혐의에 대해서 기억을 못할 만큼 무책임할 수는 없다. 

검찰에 출석하는 날 전직 대통령들도 섰던 검찰 포토라인을 외면하고 굳이 대법원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아마도 후배 법관들과 여론을 향한 호소가 아니겠느냐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고 했다. 

법은 스스로 지키는 자존만을 지켜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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