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병희의 그림이 있는 풍경-2] 광화문교차로에서, 단상(斷想)

반병희 칼럼니스트 승인 2022.06.28 13:51 | 최종 수정 2022.07.20 16:49 의견 1

[반병희의 그림이 있는 풍경-2] 광화문교차로에서, 단상(斷想)

비가 내린다.

광화문에 비가 내린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광화문이 젖었다.

비내리는 날엔 산막(山幕)의 거칠은 풀 내음이 좋지만, 흠뻑 젖은 포도(鋪道) 냄새도 익숙하다. 비린 듯, 비리지 않은 게 젊은 새댁의 젖 냄새. 어둠을 비추는 환한 밤꽃의 잔향이다.

오랜만에 찾은 광화문 사거리. 망각, 소실, 그리고 기억의 편린(片鱗).

씨알이 제법 굵어진 빗방울이 장막을 친다. 아스팔트 여기저기에 끈적끈적하게 붙어 있던 얼룩이 힘없이 부서지며 씻겨져 내린다.

장마가 시작됐단다. 장마가. 광화문 사거리에, 교차로에서도.

음성 촌놈인 나는 광화문 한복판에서 꼬박 27년을 보냈다.

청바지에 하늘색 잠바를 걸치고 첫 출근을 했던 청년이 반백이 돼 나왔으니, 골목 구석 구석에 이런 저런 사연을 좀 많이 박아 놓았겠는 가.

대부분은 젊은 치기를 이기지 못해 저지른 일이지만, 흥에 겨워 골목길을 채우기도 했다. 치기가 아름답지 않은 것은 치기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기 전이다.

야밤에 광화문 차도 한가운데에서 쉬하기, 무교동 파출소문을 발로 차고 들어가 책상 엎어 버리기, 종로경찰서 정문에서 고래고래 소리지르기 등 유치하고 낯 부끄러운 일이다. 비굴을 감추기 위한 억지였지만 그게 '직업'상의 덕목인 줄 알았다. 취기와 객기를 용기로 치환하면서.

동아일보사에서 내려다 본 광화문교차로. 장마가 시작됐다. 2022. 6. 24. [사진=반병희]


그럼에도 한 두가지는 시간을 불러내니, 그 중 하나가 광화문 교차로를 멍 때리며 내려다보던 버릇이다.

회사 건물이 광화문 사거리 바로 모서리에 자리잡은 덕에 자연스럽게 생긴 습관이다. 주로 12층, 또는 13층에 책상을 두었기에, 밖이 소란해질라 치면 창가로 달려가 우두커니 바라보곤 했다. 번잡함 속의 자유였다.

마감 후 석양녘, 창 아래 교차로를 내려다 보던 의식(儀式)은 일상이 됐고, 삶의 한 부분이 됐다.

거기엔 늘 낯선 군상(群像)이 있었다. 신호가 바뀌면 그들은 빠른 걸음으로 교차로 횡단보도를 건넜다.

돌아올 사람, 어쩔 수없이 돌아와야 하는 사람, 어디론가 가는 사람, 가야만 하는 사람, 갈 수밖에 없는 사람, 가고 싶은 사람,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입안에서 멈춘 사람, 진한 커피향이 아직도 남아 있는 에스프레소잔을 남겨 둔 채 황급히 카페를 뛰쳐 나온 사람.

구두였을까? 운동화였을까? 단단히 차비를 했겠지.

한 사람 한 사람이 전설(傳說)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흐르는 강물이었다.

정작 본인들 만이 그 사실을 몰랐다.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몰랐다. 우리 역시 이별에 고통스러워 한다는 사실을.

단절. 마디와 마디 사이에서 수많은 이야기가 피어나고 사라진다.

누군가와 같은 속도,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물을 필요도, 물어야 할 마땅한이유도 없었다. 잠시 스쳐 지나감은 우연이었을 뿐, 교차로 반대편 목적지에 도착하면 미련없이 흩어졌다. 방사형으로 낙하하는 분수처럼.

이를 앙물고 뚫어지게 정면을 바라보며 의도된 침묵으로 가장한다. 순간, 그들은 투명한 장애물을 뛰어 넘어야 할 허들 선수가 된다.

달린다. 간다.//또 달린다. 또 간다.

이글거리는 태양의 줄기가 한낮 아스팔트 위로 튕겨져 오른다. 사선을 그으며 날카롭게 튀어 오른 열기는 무수한 유리 조각이 되어 무질서하게 얼굴에 꽂힌다. 엄숙한 정오의 풍경이면 조금은 위안이 된다. 아스팔트의 침묵 정도는 감당할 수 있으니까. 단 하나, 다른 개입은 허용하고 싶지 않다. 그 것은 내 의지의 표상이다. 도시의 전투병.

광화문 교차로에서는, 횡단보도에서는, 검은 구두에 흰 와이셔츠가 어울린다. 소매는 팔꿈치까지 적당히 걷어 올려져야 한다. 간혹 삐까 번쩍한 뉴욕스타일이나 짚시 풍의 이질적 존재가 끼어들기도 하지만, 이내 무리에서 이탈한다. 이방인 처럼. 도시에서 연대(連帶)는 생명이다. 그게 숙제였다. 풀기 어려운, 아니 광화문을 떠날 때까지 풀 수 없었던 숙제였다. 연대, 연대는 내 몫을 옥조여 오는 올가미이자 굴레였다.

오감의 향연. 탐색. 색채가 좋았다. 아스팔트의 회색 빛은 충분히 넉넉했다. 온유했다. 내 어떤 흠결도, 내 어떤 수치도 감춰줄 듯했다. 얼룩말처럼 흰색 띠가 나란히 빗금 친 교차로는 도회지 세련미를 가로질러 경쾌하게 쳤다.

황제의 황금색은 아니다. 우아하고 격조 높은 황녀의 크림슨은 더더욱 아니다. 물론 구석진 재즈 바의 한물간 여가수, 그녀의 빛바랜 노란색 치마도 아니다.

모름지기 광화문 교차로는 온갖 풍파를 겪으며 쌓인 겹겹의 회색 연륜이어야 한다.

그래 맞다. 교차로는 가방이다. 짙은 회색의 가방. 온전히 내 모든 것을 담아 떠날 수 있는 가방이어야 한다.

이층 목조건물에 있던 낡고 허름한 그 술집. 봄이라 했다. 신화를 만들어내고 묻었다. 그들은 지방 소도시 변두리 어디쯤에선가 왔고, 손가방을 들고 다시 떠났다. 끝나 버린 사랑을 잊지 못해 뜬 눈으로 밤새 거리를 서성이던 사람들을 뒤로 한 채 떠나 갔다.

“그들을 사랑했나요?”

“물론입니다. 청계천에 띄워 보냈습니다.”

그렇게 청계천은 흐르고 젊음도 흘렀다.

그들이 떠나가도 광화문 교차로는 그 대로 남아 시간을 묻고 있다. 도장을 찍듯 발자국 하나 하나를 아스팔트에 새겨 나갔다. 영원히 그 자리에 머무를 기세로.

“아, 참. 가방은 들고 갔나요? 가방이 컸나요? 무거워 보였나요? 교차로에 서 있던 50대 중반의 정장한 그 남자, 기어코 그도 떠났나요?”

“네. 등뒤 허리춤에서 삐져 나온 흰와이셔츠 자락에 숨이 막혔습니다.”

“천사가 1000년에 한번씩 깃털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옷깃으로 딱 한차례, 에누리 없이 정말로 딱 한차례 아스팔트를 스치고 다시 올라 간답니다. 그렇게 스치는 것이 모이고 모아져 광화문사거리 아스팔트가 닳아 없어진다면, 그렇게 되는데 까지 걸리는 그 영겁(永劫)의 시간을 기다릴 수만 있다면 그는 광화문에서, 그의 삶에서 행복할 수 있었을 터인데요”

“그런가요? 도시 구석을 비집고 나온 가느다란 잡초에 보내는 연민은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바람에 실린 것이 무엇인지 모르나 석양녘의 노을이 되어 서쪽 하늘 어디론가로 날아간다면 그의 영혼은 무지개를 찾아 갔다고 위안 받겠지요.”

“아, 설레임일까요?”

“… …”

광화문 교차로는 너와 나를 구별짓기도 하지만, 이생과 저생을 갈라 놓는다. 사랑과 미움, 환희와 분노, 쾌락과 비애를 보내기도 하고 맞기도 한다. 다시 돌아오기도 하지만, 돌아와서는 안되는, 돌아올 수도 없는 비대칭의 교각이다.

그 것을 우리는 선택이라고 하고, 흔히 숙명이라 부른다. 혹자는 운명이라고도 하고.

투성(投性)이 아닌 피투성(被投性)의 태생적 한계다.

한때 미워하고 원망하던 분노마저 잊게 하는 기다림이기에, 내가 더 이상 너에게 의미가 없는 존재이 듯 내 몸을 얽어 매던 수많은 인연의 밧줄을 하나씩 툭툭 끊어내는 작업에 광화문 교차로는 안성맞춤이다. 네가 내가 아닌 것처럼 내가 네가 될 수 없듯이.

하루에도 몇 번이고 선택을 하고 후회하는 것을 설레임으로 오해하면 안된다.

광화문교차로는 기다림과 설레임의 혼동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들을 보호하려는 세심한 배려다. 기다림은 가진 것을 내려 놓고 떠날 수 있게 하지만, 설레임은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광화문 교차로가 설레임을 경계하는 이유다.

바램이 있다면, 남아 있기 보다는 떠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남은 자가 감당해야 할 서러움과 슬픔, 기다림의 고통을 잘 알고 있기에. 내가 네 눈물의 무지개가 될 수 없 듯이 네가 내 영혼의 눈물이 될 수 없기에.

모처럼 만에 찾은 광화문 교차로를 건넌다.

여전히 청계천은 흐른다. 지난 날 나를 실어 떠나 보냈던 것을 잊은 양 오늘도 무심코 흐른다.

<필자 소개>

-전 동아일보 모스크바특파원, 산업부장, 부국장, 미래전략연구소장

-전 채널A 경영전략본부장, 글로벌사업센터장

-전 에너지경제신문사장, 아주경제신문부문대표

-전 (주)메디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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