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병희의 그림이 있는 풍경-1] 바람은 노을이 되어

반병희 칼럼니스트 승인 2022.06.22 14:30 | 최종 수정 2022.06.23 21:14 의견 1

[반병희의 그림이 있는 풍경-1]

‘바람은 노을이 되어, 저 내는 하늘이 되어’

단오.

올해는 지난 주 금요일이었다.

해마다 단오가 되면 가슴 깊이 한켠에서 잔잔한 울렁임이 일어난다. 아련함이고 애잔함이다. 어느 때는 알수없는 서러움에 복받쳐 남들 몰래 눈물을 훔치곤 한다.

어린 시절, 아주 어린 시절 꾸었던 ‘꿈’이 있다.

상모잡이었다. 욕심을 내 간혹 외줄타기를 넘겨다 보기도 했으나 일찍이 내 주제를 깨닫고 상모잡이로 돌아오는 게 대부분이었다.

5월 단오나 7월 백중날이면 고향 음성의 가섭산 중턱 큰 절 마당에서는 풍물패 공연이 어김없이 열렸다. 가을 추수를 마쳤을 때나 농번기에도 있었던 듯 하나 기억이 정확치 않다.

나는 아주 어려서부터, 그러니까 젖을 뗀 후는 어머니 아버지를 따라 거의 해마다 구경을 갔다. 농악과 외줄타기, 꼭두각시극 등 여러 놀이가 이어졌고, 간혹 입으로 불뿜기나 당수로 바위 깨기등 차력이 더해졌다.

동원된 악기와 놀이, 기예 등으로 볼 때 곡마단은 아니었고, 잔존한 사당패에 곡마단기술 일부가 곁들여진 60년대 판 퓨전 사당패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풍물패 놀이에 대한 기억은 새 하얀 바지저고리를 입은 어린 소녀가 상모를 돌리는 장면에서 시작해 이 소녀가 상모돌리기를 마치고 인사하는 장면으로 끝났다. 소녀에 대한 기억으로 시작해 이 소녀에 대한 기억으로 끝났다는 얘기다. 크지 않은 키에 엷게 화장을 한 발그스레한 얼굴.

정신없이 머리를 돌리는 헤드 뱅뱅에 맞춰, 열두자는 족히 넘어 보이는 상모가 긴 궤적을 그려낼 때의 경이로움은 황홀 자체였다. ‘휙’ 소리와 함께 허공을 두 조각으로 ‘쫙’하고 가를라 치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숨이 멈췄다. 경이로움이었다.

힘의 역학을 알리 없는 어린 나로서는 어떻게 저 긴 끈이 고개 하나 까닥거리는 것으로 창창거리며 매끄럽게 휘돌아갈 수 있는 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빠르기는 또 얼마나 빨랐던가?

이어 소고를 높이 들고 장단 맞춰 두드린다. 프로 모토사이클 선수가 트랙 코너를 돌 듯 옆으로 눕다시피 하며 큰 마당을 돌며 만들어내는 소용돌이는 불가사의했고 신기(神技)였다

크지 않은 키에 짙은 눈썹, 실핏줄이 보이는 투명한 피부, 금방이라도 굴러 떨어질 듯한 큰 눈망울, 붉은 핏빛에 가까운 선홍색 입술, 가파르게 내뿜는 숨소리….

집으로 돌아온 나는 며칠이고 신병이 내린 것처럼 흐물흐물 했고, 다른 것을 할 의욕이 나지 않았다.

어느 날 어머니가 산밭을 매러 가시던 중 뒤따르던 나를 돌아보며 뜬금없이 물으셨다.

“엊그제 풍악패가 그리 좋았냐? 좋을 수도 있겠다…그건 그렇고 나중에 크면 무엇이(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

나는 눈치를 보며 뜸을 들이다가 “상모잡이”라고 답했다.

어머니는 뭐라고 말을 이어가시려는 듯하다가 걸음을 멈추고 한참 나를 빤히 쳐다보셨다. 이어 말없이 웃으셨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 해 이후로 나는 큰 절에서 열리는 풍물놀이패를 보지 못했다.

단오가 돼도 어머니 아버지는 절에 가시는 대신 일손을 돕는 동네 아저씨들을 집 마당으로 불러 음식을 대접했다.

마당에는 큰 솥이 걸렸고, 막걸리 몇 사발에 흥이 난 동네 분들은 풍물을 집어 들고 한바탕 흐드러지게 놀았다. 내 눈에는 시시했다. 대신 해가 갈수록 큰 절에서 보았던 그 소녀는 더욱 또렷한 모습으로 다가왔고, 기억이라는 공간을 틀어 막고 자물쇠를 단단하게 한켵 한켵 잠궈 갔다.

몇 해 지나 중학생이 됐고 입담 좋은 국어선생님을 만났다.

농삿일 돕기에 지친 애들이 졸음에 겨워 까닥까닥 졸기 시작할라 치면 그 선생님은 수업을 중단하고 특유의 걸걸한 목소리로 구수하게 얘기를 꺼내 놓았다.

안중근, 김상옥, 김좌진, 이청천, 간디, 링컨 등 수많은 인물이 등장했다. 그 중에서도 내 머리를 강하게 후려친 것은 청룡사 남사당패와 어린 소녀 우두머리 바우덕이에 관한 것이었다. 안성고개를 넘어와 음성장에서 놀이패를 펼쳤다는 남사당패 얘기에 나는 전율했다.

선생님이 묘사해 내는 바우덕이는 100년 전의 사람이 아니라 분명 나를 흔들어 놓았던 가섭산 큰 절의 그 상모잡이 소녀였다. 너무 예뻐서 서러운 것이나, 재주가 뛰어나 하늘이 시샘한 것, 자신을 짝사랑하는 수많은 청년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스스로 폐병에 걸려 24살에 요절했고, 어머니가 천주학쟁이에 찢어지게 가난해 젖먹이시절 남사당패에 맡겨졌다는 얘기는 시대를 뛰어넘어 내 눈앞에 다시 환생한 바로 그녀였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소고를 장단에 맞춰 두들기며 춤을 추던 그녀는 우상이었고, 짝사랑이었다.

안성 서운산 자락을 지키고 있는 바우덕이동상. 먼 곳을 향하고 있는 시선이 시간을 담아내고 있다 [사진=반병희]


단오 다음날인 지난 주말 안성 청룡사를 다녀왔다.

중2때 선생님으로부터 ‘청룡사’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이후 그 이름은 가슴 한 구석에 고이 묻어 두어야 했던, 결코 꺼내 봐서는 안될 나만의 그 무엇이었다.

감정이 복받치거나 울적해지면, 마음을 잡지 못해 길모퉁이에서 서성일 때면, 어머니 생각에 목이 메일 때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게 청룡사였고 그 소녀였다.

그 것은 상상의 세계였고, 미지의 세계였다. 가본 적이 없어, 만나본 적이 없어, 아니 직접 손잡아 볼 수 없는 인물들이었기에 상상은 상상을 더해 나만의 동네를 만들어 냈다.

그러던 청룡사를 50년 만에 처음으로 찾았다. 갑작스러운 결정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내리던 부슬비 탓때문이었으리라. 이제는 청룡사를 온전히 만나도 될 만한 나이가 됐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는 게 좀더 솔직한 말일 게다.

절의 풍경이나 산세(山勢)는 뜻밖에도, 정말 신기하게도 오랫동안 보아온 것처럼 익숙했다. 절 바로 옆 계곡을 끼고 자리잡은 불당골 역시 한을 참고 참다 마지못해 담아낸 모습, 눈에 익었다. 전혀 낯설지 않았다.

바우덕이 수십번 수백번 수만번 돌았을 청룡사경내 3층 석탑. 소박하고 소탈한 모습이 오히려 서럽다 [사진=반병희]


추적추적 내리는 초여름 비까지 더해 청룡사, 불당골 답사는 시간을 한참 뒤로 돌려 놓았다.

남사당패가 하염없이 바라보았을 저 산너머 하늘, 그들의 한숨과 눈물을 매일이고 담아 실어냈을 실개울, 기예를 익히고 단련했던 언덕배기, 짚이는 하나하나가 세월을 달리 해 다가왔다.

가슴속 깊이 맺혀있던 응어리가 풀렸던 탓일까? 공연히 서러움이 복받쳐 올랐다. 마치 눈앞에 바우덕이를 두고 있는 것 처럼.

그의 삶이 억울했다. 양반에 천대 받고 상민에 박해 받고. 길을 따라, 바람을 따라 떠돌야 했던 그녀를 목놓아 울게 해주고 싶었다.

저 산을 넘어가면 편안하게 쉴 수 있을 거라고, 저 바람 저 구름을 타고 가면 자유스럽게 훨훨 날을 수 있는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아니 당신은 이미 이 하늘 저 하늘을 막힘없이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있지 않느냐?고 묻고 싶었다. 잊으라고, 이 생에서 만났던 인연들을 잊고 이제는 행복하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길과 길이 만나, 길과 물이 만나, 길과 산이 만나, 산과 산이 만나, 산과 하늘이 만나, 바다와 하늘이 만나는 그 곳에서 부디 행복하라고.

살갗을 간지럽히며 부슬부슬 내리던 가는 비가 빗방울을 크게 하며 얼굴을 때리기 시작했다.

가섭산 큰절에서 만났던 그녀를, 바우덕이를, 내 어린시절의 꿈 ‘상모잡이’를 빗줄기에 실어 먼 하늘로 올라 가겠다는 듯이. 얼굴을 타고 빗물이 흘러 내렸다. 청룡사의 모습도 빗속으로 윤곽을 감춘다. 사람앓이를 했던 내 어린시절과 함께.

사당 구석 바우덕이 동상 기단에 새겨진 글귀를 남긴 채.

‘바람은 노을 되어’

<필자 소개>

-전 동아일보 모스크바특파원, 산업부장, 부국장, 미래전략연구소장

-전 채널A 경영전략본부장, 글로벌사업센터장

-전 에너지경제신문사장, 아주경제신문부문대표

-전 (주)메디팩 대표

저작권자 <지식과 문화가 있는 뉴스> ⓒ한국정경신문 | 상업적 용도로 무단 전제, 재배포를 금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