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창현
승인
2024.11.06 07:29 | 최종 수정 2024.11.06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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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힘든 수술을 하고 너무 힘든 고통을 겪었다. 미약한 자존심인지 나의 아픔을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몸 상태가 조금 좋아진 이제, 일상의 활동이 가능하고 그 때의 심정과 다르게 나의 옹졸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 때 상황과 고통은 어찌 말할 수 없도록 견디기 힘들고 심했으며, 병원에서 처방해 준 진통제조차 잘 듣지 않았고, 가족들의 위로도 도움 되지 않아 그냥 머리를 박은 채 신음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의 거동에도 기구에 의지해 걷고 활동도 자유롭지 못하고 모든 움직임이 원활하지 못했다.
그 즈음에 나의 고통보다 더 큰 상황으로 돌아가셨을 부모님이 절실히 생각났고, 제발 더 아프지 않도록 도와 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하면서 그리움에 사무쳤다. 그와 더불어 돌아가신 아버지의 지팡이가 불현듯 생각이 났다.
아버지는 지병인 고혈압과 당뇨로 오랜 기간 병마에 시달리셨다. 그로 인해 신체 왼쪽에 마비 증세도 있었으며, 허리까지 좋지 않으셔서 먼 거리 걷기가 불편하셨다. 그래서 좋아하지는 않으셨지만, 보행에 도움이 된다는 의사의 말에 따라 지팡이를 사드렸다. 어머님이 먼저 돌아가셔서 혼자였던 아버지는 용산의 실버타운에 계셨고, 몸이 불편하신 분들 중에는 지팡이에 의지하시는 분들이 다수 계셨다.
아버지는 지팡이를 짚고 다니시는 분들의 모습이 보기 좋지 않으셨는지, 지팡이를 한두 번 사용하시다 사용을 멈추셨다. 가끔 아버지를 뵈러 갈 때 여전히 한쪽 편이 부자연스럽고 걷기도 힘들어 하실 때가 많았고, 그럴 때면 나는 퉁명스레 아버지께 지팡이를 짚으면 좀 편안할 것인데 하며 사용하시길 강요했던 것 같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건장함을 모두에게 보이고 싶은 남자의 마음이셨을 테고, 아직은 지팡이에 의존하는 것이 겸연쩍기도 하셨던 것이었다.
역사 속에서 지팡이는 나이든 어른께 바치는 감사와 영광의 상징이었다. 청려장(靑藜杖)이라 하여 밭이나 들에서 흔히 자생하는 비름과의 한해살이 식물인 명아주로 만든 지팡이였고, 어르신들의 무병장수의 상징하는 것이었다. 청려장의 역사는 당나라 시인 두보의 작품 ‘모귀’(暮歸)에 ‘명일간운환장려’(明日看雲還杖藜)라는 시구가 있고, 여기서 ‘장려’(杖藜)가 청려장을 가리키므로 7세기경부터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라 시대의 김유신 장군이 노령을 이유로 은퇴를 결심했을 때 문무왕이 이를 만류하며 내린 것이 등받이와 지팡이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장수한 노인의 상징으로 여러 종류의 청려장이 있었다. 쉰 살이 된 아버지에게 자식이 바치는 ‘가장’(家杖), 예순이 되었을 때 마을에서 선사하는 ‘향장’(鄕杖), 일흔에 국가에서 주는 ‘국장’(國杖), 여든 살이 되었을 때 임금이 하사하는 것을 ‘조장’(朝杖)이라 하였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단순한 지팡이가 아니라 집안, 마을, 국가를 위해 헌신해 온 생애를 공경한다는 뜻을 담고 쇠약해진 몸을 의탁하지만 지혜와 자존감을 널리 펼쳐 달라는 것이었다.
내가 아버지께 지팡이를 마련해 드린 때는 아버지도 여든이 넘으셨으니, 조선시대였다면 이미 4개의 자랑스러운 지팡이를 가지셨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1992년부터 100세가 되어야 ‘세계 노인의 날’인 10월 2일에 대통령이 청려장을 수여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제 100세는 넘어야 국가와 집안의 영광스러운 어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청려장은 아니었지만 아버지의 불편함을 덜어드리고자 사 드렸던 정성이 부족한 지팡이는 어떤 이유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항상 현관 앞에 놓여 있기만 했다. 결국 아버지는 손 때를 묻히지 않은 채 먼 길을 떠나셨다. 다시금 생각하면 정성이 깃든 좀 더 좋은 청려장 이상의 지팡이를 드리지 못한 것에 송구하며 그저 모자란 나를 자책할 뿐이다. 지금은 어딘지 모를 그곳에 계신다면 현세의 모든 아픔 던지고 내세의 편안한 삶을 누리시길 기원한다. 그곳에서는 아버지의 지팡이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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