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성 칼럼] 이승만은 왜 '3.1혁명'을 운동으로 격하했을까?

100년 전 3월 봉기는 운동이 아니고 혁명이었다.

김재성 주필 승인 2019.02.27 11:04 | 최종 수정 2019.03.01 00:29 의견 9

[한국정경신문=김재성 주필] 100년 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불을 댕겨 당시 우리나라 인구의 10분의 1이 넘는 220만명이 들고 일어나 2만3000여명이 죽거나 다치고 4만6000여명이 투옥된 거족적인 봉기였다. 이를 우리는 ‘3.1운동’이라고 부른다.

과연 그것이 맞는가? 100주년을 즈음하여 시민단체들이 문제를 제기했다. 이에 이낙연 총리가 화답을 하고 정운현 비서실장이 33인의 행장을 모은 저서를 ‘3.1혁명을 이끈 민족대표 33인’이라고 명기했다. 그리고 시민단체가 주관하는 모든 기념행사는 ‘3.1혁명’으로 통일했다.

왜 ‘3.1운동’이 아니고 ’3.1혁명‘이어야 하는가? 자로가 스승 공자에게 물었다. “위나라 군주가 선생님에게 정사를 맡기면 무엇을 먼저 하시겠습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반드시 이름(명분)을 똑바로 하겠다.(必也 正名乎)” 자로가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고 느꼈음인지 공자는 거듭 말했다.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조롭지 못하고 말이 순조롭지 못하면 일이 성사되지 않는다(名不正則言不順 言不順則事不成)”

동북아시아의 전통은 명분을 중시한다. 박정희와 박정희를 배운 전두환이 군사반란을 일으켜 놓고 계엄 하에서 국민투표를 하고 체육관선거일망정 선거 절차를 거친 것도 ‘민주주의’라는 명분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명분(名分)이란 말 그대로 이름에 맞는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에 ‘민주공화국’의 정체성이 들어 있듯이 어떤 사회단체나 친목회든 그 명칭에 모임의 취지와 지향하는 바가 들어있다. 그래서 정명(正名)이 중요하다. 명칭이 인식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남경태 씨의 ‘개념어 사전’ ‘혁명’난에 ‘내 팔자에 무슨 난리야’라는 속담이 인용된다. 혁명이 민심에 반하는 기존 질서를 뒤집어 엎는 데 있음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혁명(革命)의 문자적 뜻은 명命을 바꾸는(革) 것이다. 명(命)은 천명이고 하늘은? 백성이 하늘이다.(以民爲天) 왕정이든 귀족정이든 민주정이든 시대에 따라 제도는 달라도 목적은 민생이다. 역사는 민본을 위한 진보이며 그 진보가 특정 세력에 의해 정체되면 필연적으로 혁명이 일어난다.

그런 의미에서 3.1절은 혁명의 요건을 충분히 갖추었다. 편의상 3.1절이라 부르지만 3월 1일 하루 거사가 아닌 몇 달에 걸친 거국적 봉기였다. 나라 안은 물론이고 일본, 미국, 중국의 동포들도 뜻을 같이 해 그 결실이 상해 임시정부로 이어졌다.  

내 건 기치도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일치한다. 3.1혁명의 연장선상에서 탄생한 임시정부 국호가 “대한제국‘이 아닌 ’대한민국‘이었다. 일본제국은 물론 대한제국도 부정한 것이다. 제헌 헌법의 모태인 임시정부의 ‘대한민국임시헌장’도 ‘3.1대혁명’을 명기하고 주권의 주체로 ‘인민’을 내 세웠다.

강령과 헌장이 그렇듯이 임시정부의 요인들은 서로를 혁명가로 칭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아들이 행상을 하는 것을 보고 그 친구가 호통을 치면서 '혁명가 아들이 그게 무슨 꼴이야"며 호통을 쳤다는 일화며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의 이야기에도 '혁명사업' '혁명가'라는 표현이 스스럼 없이 나온다.  

'언제부터 '3.1운동'으로 격하되었는가? 제헌헌법이다. 그리고 현행 헌법 전문에도  '3·1 운동'으로 명시돼 있다. 그 전말은 이렇다. 유진오를 비롯한 헌법기초위원회의 초안 전문은 "대한민국은 3·1 혁명의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로 돼 있었다.

그런데 국회 본회의에서 사단이 생겼다. 조국현이 “독립운동은 혁명이 될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우면서 '3·1 혁명'을 '항쟁'으로 바꾸자고 주장하자 이승만이 여기에 가세했다. 뒤이어 이승만의 핵심 측근 윤치영이 적극 동조해 '광복'이라는 제안을 했고 다시 조헌영이 '3·1'운동'을 제안했다.

격론 끝에 이승만계열의 윤치영, 한민당의 백관수, 김준연, 친일파 출신 이종린 등 5명으로 구성된 '소위'에서 조헌영이 제안한 '기미 3·1 운동'으로 바꾼 수정안을 제출했다. 그러자 사회를 맡은 이승만이 토론을 막은 채 수정안을 표결에 붙여 통과시켰다("재석의원 157  가 91, 부 16")

독립운동을 혁명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주장은 토론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임시정부 강령이나 국내외 애국 투사들의 목적이 왕정복고를 넘어선 민족자주 인민자유 세계평화 실현에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또 그 자신이 혁명이라는 용어를 수 없이 써 온 이승만이 왜 ‘혁명’을 운동으로 바꾸는 데 앞장섰을까?

헌법 전문 개정 운동과 함께 이 부분도 연구과제다.

저작권자 <지식과 문화가 있는 뉴스> ⓒ한국정경신문 | 상업적 용도로 무단 전제, 재배포를 금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