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성 칼럼] 혐오 뒤에 음모 있다..난민 집회에 엄마부대
김재성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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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6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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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경신문=김재성 주필] 한국은 혐오 사회인가?. 여성혐오, 동성애혐오, 장애인혐오, 난민혐오, 이슬람혐오와 이에 대응하는 혐오가 뒤엉켜 혐오가 혐오를 낳는 구조, 지금 한국 사회의 실상이다. 일상의 언어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혐오는 실재와 다른 이미지를 SNS를 통해 반복 복제함으로써 호남인은 ‘홍어’, 여자는 ‘김치녀’ 아니면 ‘된장녀’, 노인은 ‘틀딱’으로 대체 되는 현상.
21세기 문명사회에서 어떻게 이런 혐오가 횡행하는가? 그 매카니즘은 어떻게 작동되고 그 연원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한신대학교에서 기독교 윤리학을 가르치고 있는 이상철 목사는 이를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종 피부 종교 등을 기준으로 혐오와 배제의 집단적 광기가 작동했고 그 배경에는 지배집단의 내부 결속을 위한 음모가 있다”고 설명한다. 한신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시카고신학교에서 기독교 윤리를 전공한 이 목사는 현대철학을 주도하고 있는 사상가들 레비나스에서 데리다까지 이론을 섭렵하면서 대중문화와 당대의 윤리적 문화적 이슈를 고찰하면서 이 문제에 천착했다. 돌베개 출판사에서 최근에 펴낸 <죽은 신의 인문학>이 그 결과물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끈질기게 탐구한 주제는 근대로부터 금융자본주의로 명명되는 신자유주의시대에 이르기까지 대중의 소외와 불안, 이를 추적하다 보면 주체와 타자 문제가 대두되고 그 과정에서 타자에 대한 혐오가 어떤 심리적 사회적 매카니즘에 의해 생성되는지를 분석했다. 그에 의하면 타자는 너와, 너희들, 그들, 여자 백인 흑인 이교도로 지칭되는 존재론적 타자, 우리의 감각과 경험너머에 존재 하는 인식론적 타자, 내 안에 있으면서 까닭모를 불안 요인이 되는 정신분석학적 타자로 분류된다. 그중에서 신과 이웃은 대표적인 타자다.
그런데 신은 경외의 대상이며 마찬가지로 나 보다 강한 타자도 복종하고 모방해야 하는 타자다. 반면 나보다 못한 이웃은 우리 안으로 진입하면 동질성을 훼손하고 내 것을 빼앗아 갈수 있으므로 배제와 혐오의 대상이 된다. 예수가 <사랑하라>고 그토록 강조한 <이웃>이 바로 원시적 감정에 맡기면 혐오의 대상이 되는 ‘타자’라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철학은 순혈주의 등 기존의 규범과 권위를 ‘해체’하고 나와 다른 것에 대한 ‘환대’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한국 사회 혐오의 기원은 해방 후 권력을 장악한 친일 세력이 취약한 도덕적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 ‘빨갱이 혐오’를 확대 재생산 해 온 것이 데서 비롯된다. 여기에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월남한 기독교 세력이 한 축을 거들면서 혐오가 중요한 통치기반이 되면서 ‘말 많으면 공산당’ 식으로 반대를 혐오하는 문화를 낳았다.
한국 개신교는 지구촌 오지 곳곳에 선교사를 파견하고 있지 않은가? 아프리카 난민들에게 구호물자를 전하면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함께 부르면서 정작 제 발로 찾아온 난민은 극도로 혐오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리고 갑자기 성소수자 문제를 극성스럽게 이슈화하 하는 저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뭔가 새로운 외부의 적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될 내부의 동요가 있다는 반증이다.
역사적으로 혐오의 배후가 그랬고 일베의 호남혐오가 ‘그냥’이 아니었음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엄마부대 주옥순 대표와 태극기집회의 친박 세력이 제주도 난민 반대집회에 나타난 저의는 무엇일까? 이들이 내건 ‘난민을 받으면 공산화 된다’는 또 뭔가? 빨갱이 혐오는 여전히 약효가 있는 비방(秘方)인가?
돌을 던지면 개는 돌을 쫓고 호랑이는 돌을 던진 사람을 쳐다보듯 혐오의 극성 뒤의 그 무엇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유럽에서 난민문제는 극우정당을 불러왔다”는 김어준 씨의 ‘촉’도 새겨 볼만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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