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경신문=윤성균 기자] 정부가 보이스피싱 피해에 대해 금융사가 전액 배상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은행권은 '피해자 보호 강화'라는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허위 신고와 제도 남용 등 부작용에 대한 대책이 미흡하다고 우려하고 있다.
윤창렬 국무조정실장이 28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보이스피싱 근절 종합대책 관계부처 합동브리핑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29일 금융권에 따르면 정부와 금융당국은 전날 보이스피싱 근절을 위한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연내 ‘무과실 배상 책임’ 법제화 추진이 핵심이다. 피해자가 직접 돈을 이체했더라도 과실이 없다면 은행이 피해액의 전부 또는 일부를 배상하도록 법적 근거를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강력한 대책이 나온 배경에는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는 피해 규모가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올 1월부터 7월까지 발생한 보이스피싱 피해액은 7766억원이다. 2023년 연간 4472억원의 두 배에 육박한다. 특히 AI 딥페이크 기술로 가족의 목소리와 얼굴까지 복제하는 등 수법이 날로 정교하고 복잡해지면서 더 이상 개인의 주의만으로 피해를 막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이미 은행권에서는 ‘비대면 금융사고 책임분담 기준’을 마련해 자율적으로 배상해 왔다. 하지만 피해자가 직접 송금한 경우 과실이 인정돼 보상에 한계가 있었다. 실제로 2024년 1월 책임분담 제도 도입 이후 배상액은 1억6000만원에 그쳤다.
이번 법제화를 통해 피해자 보호의 실효성을 높이고 금융사에도 적극적인 피해 예방 노력을 유도하겠다는 것이 정부 복안이다.
은행권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간 수백억원을 투자해 이상거래탐지시스템(FDS)을 고도화하고 대국민 캠페인을 벌이는 등 보이스피싱 예방을 위해 노력해왔는데 범죄의 책임을 은행이 떠안는 구조는 부당하다는 것이다.
특히 가장 우려되는 대목은 ‘도덕적 해이’와 ‘제도 남용’ 가능성이다. 무과실 배상 책임이 도입되면 실제 사기 피해가 아닌데도 은행에 보상을 요구하는 허위 신고가 급증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보이스피싱 피해를 입증하는 과정이 명확하지 않으면 다른 이유로 돈을 잃은 사람들까지 제도를 악용할 소지가 크다”고 말했다.
FDS 고도화와 전담 인력 확충에 더해 막대한 피해 배상액까지 떠안게 될 경우 늘어난 비용이 결국 대출금리나 수수료 인상 등 소비자 부담으로 전가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정부는 이러한 부작용을 막기 위한 안전장치를 함께 마련하고 있다. 우선 금융사·통신사·수사기관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보이스피싱 AI 분석 플랫폼’을 구축한다. AI 패턴분석으로 의심 계좌를 실시간으로 탐지하고 사전에 지급 정지하겠다는 것이다.
또한 수사당국과 금융사 간 정보 공유 체계를 강화해 피해 사실을 엄격하게 검증하고 불법 개통 휴대전화(대포폰)를 신속히 차단하는 등 범죄 인프라 자체를 무력화하는 방안도 병행한다.
은행권에서는 무과실 배상 책임 제도화의 부작용을 막기 위해서는 정교한 제도 설계와 운영 시스템이 갖춰져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고객 피해를 최소화할 제도는 필요하지만 부작용을 차단할 수 있는 정교한 장치 없이는 제도 취지가 퇴색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