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이 문을 닫고 떠난다. 특별한 문제도 없이 이것저것 챙기다 허둥지둥 계단을 내려오니 야속하게 떠나는 님처럼 한 발치 앞에서 지하철이 떠났다. 도착 시각이 느린지 빠른지 첫 차나 마지막 차량이 아니어서 연속해 오가는 지하철은 분간이 그리 쉽지 않다. 이미 정해진 계획에 도착했을 테고, 출발해야 하는 약속으로 진행될 뿐이었다.

일상에서 자주 겪는 일이지만 무언가를 기다리는 시간이 때론 무료하고 아깝다는 생각에 시간에 맞춰 빠듯하게 일정을 잡을 때가 많다. 이럴 때는 허다하게 많이 일어나는 계획과 다른 변수로 인해 지연이 발생하고 종국에는 지각이라는 결과에 아쉬움과 후회를 만들기도 한다. 조급함에 바삐 움직이다 보면 너무 일찍 도착해 멍한 기다림으로 시간을 허비하기도 하고 서둘다 보니 뭔가를 하나씩 놓치기도 한다.

또한 약간은 여유를 가진 시간이라 느릿하게 움직이다 보면 어느새 약속의 시간을 지나쳐 때늦은 후회를 하기도 하고, 조금 빨리 나온다 생각해 서둘러 나오다 보니 기다림에 허망한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을 들기도 한다. 물론 느림과 빠름 속에 만들어지는 많은 이점이 있음에도 마냥 느리거나 빠르다 보면 때로는 문제와 실수가 생기기도 한다.

지난 기억을 돌아보면 여유와 느림에 인해 발생한 지각과 놓침의 사건들이 많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유독 잦은 느림으로 문제를 야기했던 남달리 여유로운 친구가 있었다. 남의 시선이나 생각에는 그다지 마음을 두지 않고 자신의 패턴으로 움직이는 친구였다.

우리는 그리 넉넉지 않은 시절에 함께 여행을 계획하였고, 새벽기차를 타고 바닷가와 계곡에 가서 캠핑을 하는 일정을 세웠다. 그리고 각자 분배된 준비물을 챙겨서 역 대합실에서 기차 출발 30분전에 만나기로 하였다. 물론 항상 지각이 많은 그 친구에게는 여러 차례 약속 시간에 늦지 않을 것을 부탁하고 각인도 시켰다.

요즘처럼 모바일이나 교통이 발전했다면 수시로 연락도 할 수 있었겠지만 전화기도 귀했던 시절이라 오직 약속 만으로 역 대합실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같은 동네 친구와 시간에 맞춰 역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그 친구가 늦지 않기를 기대하며 약속 장소로 갔다. 역 대합실을 들어서는데 저 멀리서 손을 흔들며 우리를 반기는 그 친구는 다행히 먼저 도착해 있었고, 순졻게 출발했다.

여행의 기쁨과 설렘으로 기차에 몸을 싣고 바닷가의 첫 목적지에 무사히 텐트를 치고 즐겁게 첫 날 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우리는 1번 추억록에 기록될 잊지 못할 여름밤을 보내고, 두번째 목적지인 시원한 계곡과 폭포가 있는 산으로 이동하려 바다내음까지 함께 짐에 단단히 여며 이동을 준비했다.

아! 그러나 바로 이때 우리에게 지워지지 않을 추억의 사건이 발생했다. 바다에서 산으로 가는 버스를 타러 터미널에 이동해서 차표를 발권하고 버스를 기다렸다. 그 시절엔 조금은 무질서 했고 복잡했던 때라 우리도 각자 짐을 챙긴 후 한자리라도 차지하려 밀고 당기다 흩어진 채 겨우 버스에 올랐다.

시루 같은 버스 안은 땀냄새와 바닥의 진동이 섞여 움직이기 시작했고, 약간의 틈이 발생하여 여유를 가질 즈음, 함께 있어야 할 그 친구가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하지만 버스는 이미 떠났고, 다시 돌아갈 차편이나 연락할 도구도 없음에 그저 멍하니 서로를 쳐다볼 뿐이었다. 거기다 차표도 여행경비도 우리에게 있으니 남은 그 친구가 어찌할 도리도 없음에 안타까워하며 두 번째 목적지인 산 근처 주차장에 도착했다.

우리는 그 친구를 찾아 다시 돌아 갈 것인가 아님 다음 차를 기다릴까 의논을 하다 일단 기다려 보기로 결정하고 대합실에 잠시 짐을 내려두고 기다렸다. 다음 차는 한 시간 정도 후에 도착이 예정돼 긴 기다림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별별 상상을 다했으며, 그 친구를 원망도 하고 측은함을 갖기도 했다.

다음 차가 도착했고, 승객들이 한명 두명 내려 각자 만남과 갈 길을 가는 그 순간 그 친구가 머쓱하게 내리는 모습을 발견하고 모두가 환호를 지르며 달려갔다. 일단은 다시 만남에 감사했고, 어떻게 홀로 남았다 뒤늦게 올 수 있었는지도 묻고 답하며 밤을 지샜다. 그렇게 두 번째 숙영지에서 우리는 밤새 그 친구의 무용담을 전해 들었다. 버스를 놓치고 돈이 없어 구걸하듯 다음 차편을 구해서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그 친구의 느림과 여유에 당시의 절박함이 곁들여 있었다.

지금도 그 친구는 여전히 느리지만 밉지 않은 핑계와 느긋한 여유를 가지고 약속 장소에 나타나며, 그의 이름을 불러 답하면 전원이 참석했음을 확인한다.

빠름에 의해 생긴 추억도 있다. 청춘의 혈기가 불타오르던 시절에 대학 선후배들이 함께 야유회를 가기로 했다. 그 시절엔 흔히 계곡에서 불을 피워 고기를 구워서 먹으며 음주가무도 하곤 했었다. 물론 지금은 전설 같은 옛이야기로만 남았고, 많은 정비를 통해 관광지에는 다양하고 맛난 음식점과 놀이시설이 즐비하게 대체됐다.

우리는 오랜만에 공기 청량한 야외에서 맛난 고기에 즐거운 시간을 갖는 상상으로 갖은 음식과 음료, 주류를 준비해 시외버스를 타고 목적지를 향해 떠났다. 그 중 대장 격인 선배가 있어 마련된 준비물을 각자에게 책임을 지워 나눠주고 잘 챙겨 가기를 신신당부하며 분배했다. 특히 가장 중요한 고가의 고기는 듬직하게 덩치 큰 후배에게 맡겼다.

대장 선배는 평소에 모든 일처리가 빠르고 급한 성격에 세밀함을 가졌고, 든든하게 보이며 고기를 담당한 그 후배는 내가 보기에 잘 흥분하고 덜렁대는 면이 있었다. 여하튼 그렇게 한껏 부푼 마음과 설렘에 들떠 버스 안에서도 재잘대며 웃음이 끊이지 않는 분위기를 이어갔다.

터미널을 출발해 한 시간을 넘게 달려 도시를 벗어나 시골길을 지나서, 목적지 근처 정류장이 다가오자 대장 선배는 화급하게 내릴 준비를 하라며 모두를 재촉했다. 왁자지껄했던 분위기는 금세 수그러졌고, 도착도 하기 전에 내릴 준비로 부산을 떨었다.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여전히 대장 선배는 각자의 짐을 잘 챙겨 안전하게 빨리 내려라 다시금 재촉했고, 우리 모두는 나름 질서정연하게 버스에서 급히 내렸다. 물론 가장 중요한 준비물인 고기를 담당한 그 후배도 서두르며 버스에서 내렸다.

계곡 상류로 향한 길을 한참을 걸어 우리만 오붓하게 즐길 수 있는 한자리를 찾았고, 각자 준비물을 한군데로 모았다. 대장 선배는 짐을 하나씩 확인하며 챙겨 나갔다. 나머지는 전체가 앉을 자리를 정비해 각자 위치를 정했고, 선배는 물, 음료, 과자, 반찬, 라면, 주류 등이 있는지 순차적으로 확인했다. 오랜만의 야외 활동에 자리한 모두가 들떠 조잘대며 즐거워하던 그때 갑자기 하늘을 찌르는 고함이 터져 나왔다. “야! 고기, 고기가 없다.” 하며 담당이었던 그 후배를 찾았다. 함께 기쁨과 흥분에 빠져 정신없던 그 후배는 당황하며 불려 왔고, 극도로 화가 난 선배는 그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그 후배는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대기 시작했고, 급기야 떠나 버렸을 버스정류장으로 빛의 속도로 뛰어가고 있었다. 그 뒤를 대장 선배가 소리 지르며 따라 갔고, 남은 우리는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야유회를 대표할 음식이었던 고기를 부디 되찾아오기를 기대할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지난 후 잠시 조용하게 다소곳이 기다리는 우리의 시야에 나타난 선후배는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가장 소중한 고기를 찾았는지 묻고 싶었지만 축 처진 그 두 사람의 모습에 아무 말하지 못했고, 선배의 손에 들린 조그만 봉지가 눈에 뜨였다.
후배에게 들은 얘기는 버스에서 빠르게 내리려 맨 뒷자리 의자 뒤편에 둔 고기를 챙기는 것은 잊어 먹고 다른 짐만 챙겨 버스를 내린 것이었다. 그리고 화난 선배를 보면서 더욱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이런 저런 핑계를 늘리다 더 혼만 났다. 하지만 떠나버린 고기를 찾을 길 없어서, 부족한 여유 돈으로 유원지 근처에서 비싸게 고기를 조금 사왔다고 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 분위기는 점차 되살아났고, 아쉬움은 있었지만 고기는 너무나 맛나게 먹었다. 부족한 고기에 대한 아쉬움은 재밌는 놀이와 흥겹게 부르던 포크 송에 묻혀 잊혀졌다. 아쉬운 배고픔도 야외놀이 최고 별미인 라면으로 채워졌고, 즐겁고 유쾌했던 추억의 한 페이지로 남았다.

항상 한발 빠르게 움직이며 모두를 챙기고 다그치던 그 선배는 여전히 자신의 삶과 일들을 헤치며 앞서 살아가고 있고, 우리 모두도 변화무쌍한 세상의 흐름을 따라 빨리빨리를 통해 더 좋은 생활을 담고 있다.

이처럼 때로는 느리게 여유를 통해 가질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고, 때로는 빠르고 꼼꼼함에 의해 더 많은 기회들도 찾을 수도 있다. 여러 일들과 과제 앞에서 적절한 느림과 빠름을 조화롭게 선택해 하나씩 풀어 갈 수 있는 자질을 우리가 가질 수 있다면 더 많은 기회 속에 좋은 결과까지 획득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나에게 좋은 추억과 교훈을 남겨준 느림과 여유를 가진 그 친구와 빠르고 꼼꼼하게 앞서 가는 선배에게 이 글을 통해 감사를 전한다. 느리고 빠르다는 것은 시간의 맞춤법에 있는 것이지만, 그 환경이나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철학과도 같다. 다시금 복잡다난한 현실에서 발생하는 많은 문제와 벽을 넘어설 최적의 느림과 빠름을 적용하려 노력하고 그 결과를 오늘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