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이러려고 역대급 실적냈나”..당국 눈치에 괴로운 금융지주

윤성균 기자 승인 2022.07.22 10:36 의견 0
금융증권부 윤성균 기자

[한국정경신문=윤성균 기자] 고금리·고물가의 복합경제위기 상황에서 KB금융그룹이 역대급 실적을 거뒀다. 22일 실적 발표를 앞둔 신한·하나·우리금융그룹도 KB금융에 이어 역대급 실적 달성이 점쳐지고 있다.

악조건 속에서 달성한 역대급 실적이 안 반가울 리가 없는데 금융권은 어느 때보다 조심스러운 모습이다. 역대급 성적표가 고통 분담 ‘청구서’로 되돌아 올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새정부의 금융당국 수장들은 연일 금융사를 향해 고통 분담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대출금리 인하를 넘어 취약 차주에 대한 '원금 탕감'까지 요구하고 있다.

고민은 실적 발표 보도자료에도 묻어났다. 당국 눈치에 어느 때보다 단어와 문장을 신중하게 고른 티가 났다. ‘역대급’, ‘사상 최대’ 같은 단어는 찾아 볼 수 없었고 대신 ‘사회적 책임’, ‘서민’, ‘소상공인’ 등의 단어가 포함됐다. 예전 실적 자료에서는 좀 처럼 볼 수 없는 단어들이다.

아예 KB금융의 실적 발표 자료 부제는 ‘서민·취약계층을 위한 선제적 금융지원으로 실질적 연착륙 지원’이었다. 그래도 기자들은 기사 제목에 ‘역대급’, ‘사상 최대’ 같은 표현을 빼놓지 않고 붙였다. 그것이 팩트이기 때문이다.

지난주 하반기경영전략회의를 진행한 모 금융지주는 엠바고(보도 유예)로 배포했던 보도자료를 한차례 수정해 재배포한 일도 있었다. 자료 수정은 오타, 사진 교체 등을 이유로 으레있는 일이라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지만 수정된 자료를 보니 예삿일은 아니었다.

제목을 비롯해 핵심적인 워딩들이 크게 바뀌었는데 특히 취약계층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 회장의 발언이 추가된 것이 눈에 띄었다. 자료 수정의 자세한 내막까지 알 수 없지만 다만 추측해볼 수는 있다. 경제위기 상황에서 고통분담을 요구하는 당국의 눈치를 외면할 수 없어서 메시지를 추가한 것이 아닐까 하고.

마침 전날 김주현 금융위원장과 5대 금융지주 회장간 첫상견례가 있었다. 국내외 금융 시장 상황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고 금융권의 리스크 대응 방향을 논의하는 자리였지만 고통분담 요구도 빠지지 않았다.

특히 김 위원장은 회장들에게 지난주 정부가 발표한 ‘125조원+α’ 규모의 채무부담 경감 프로그램에 적극 협조해줄 것을 당부했다. 아직 ‘빚투 탕감’ 논란도 채 가시기 전인데 기어이 금융지주를 들러리로 세우겠다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금융지주 회장들은 정부의 민생안정 정책에 적극 호응하겠다고 화답한 것으로 전해졌다. 당국이 팔을 비틀고 있는데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금융지주의 역대급 실적이 예고된 이날 오전 코스피에서 4대 금융지주 주가가 1~2%씩 빠지고 있다. 관치 금융의 그늘에 투심도 싸늘하게 식고 있다.

저작권자 <지식과 문화가 있는 뉴스> ⓒ한국정경신문 | 상업적 용도로 무단 전제, 재배포를 금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