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국민학교(현재의 초등학교, 이하 초등학교) 시절이 많다. 포항의 이가리라는 곳을 시작해 영천시의 영화라는 곳, 청통면의 호당을 거쳐 대구의 동도로 옮겨와 동성이라는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 중의 호당은 가장 긴 시간을 보낸 초등 시절의 마을로 아버지가 근무하시던 학교로서 나도 그곳을 다녔다. 학교의 규모는 한 학년에 2반 이하로 구성되어 있고, 주변의 10리 이내 다른 마을 학생들이 있었다. 호당동은 그 당시에는 주변 마을보다 가장 큰 마을로 초등학교가 있었고, 김녕 김씨의 집성촌으로 아늑하고 조용한 마을이었다.
나는 그 학교를 오래 다녔지만 졸업은 하지 못했으며, 그후 27회 졸업 동기 대우는 받고 있고 지금도 그 때의 친구들과 만나고 있다. 하지만 현재 호당초등학교는 학생 수가 점차 줄어들어 분교에서 다시 폐교가 되어 다른 시설로 활용되고 있다.

중학교를 지날 무렵부터 호당은 나에겐 제2의 고향과 같아 시골 친구들과 친하게 지냈으며, 대구의 친구들과 함께 찾기도 하였다. 그때부터 푸르른 추억들이 많이 만들어 지기 시작했다. 여름방학에는 동기들과 모여 밤의 별을 헤며 낚시도 하고 과일 서리도 했으며, 겨울 방학에는 추위에 떨며 이 마을 저 마을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집이나 과수원에서 놀기도 했다.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호당의 친구들이 내가 살던 대구로 유학을 오기도 하였고, 그들은 하숙으로 자유로운 생활을 했기에 나와 다른 점도 있었다. 이때를 계기로 점차 교류의 폭을 넓혀가며 여러 친구들과 만남을 갖던 시기이기도 했으며, 너무나 아련하고 꿈만 같은 추억과 함께 많은 이야기가 만들어 지기도 했던 비밀스런 시간들도 있었다.
호당을 가기도 했지만 대구나 영천, 경주 등을 여행하며 우정을 쌓아갔다. 하지만 서로의 이해 부족과 달라진 환경으로 인해 관계가 소원해지기도 했고, 다시 만나는 가운데 각자의 길이 달라지며 만남도 줄어들었다. 아마도 파란 청년과 빨간 처녀의 마음과 같이 농숙해지며 바뀌어 가는 생활과 환경에 따라 변화를 겪는 시기였던 것 같다.

대학을 진학하면서 각자의 목표와 사고가 방향을 달리하며 관계는 더욱 소원해지고, 점차 바쁨 속에서 멀어져만 갔다. 다시 군입대, 취업, 결혼의 시간을 지나며 가끔은 서로의 안부를 전하긴 했지만 새로운 각자의 생활에 여유를 찾기 어려워 만나기가 어려워졌다. 나는 더 멀고도 혼잡한 서울의 생활을 시작하며 더 많은 허들이 있었다. 그러다 각자의 직장과 생활이 안정되어 가면서 조금씩 시간의 여유가 생겼고, 그리운 추억의 앨범의 모습을 그리워하며 서로를 찾게 되고 만남이 다시 이어졌다.
이런 시간들의 과정에서 만들어진 시골 친구들의 관계는 도시의 친구들이 가지지 못하는 추억과 만남과는 다르게 전개되고, 그 돈독함의 깊이도 다르게 느껴진다. 그 때 그 시절에는 도시보다 만남의 폭이 넓지 않아 친구들에 대한 강한 우정이 깊게 만들어지고, 그나마 가끔 만날 수 있는 같은 고향이라는 점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씨족 사회구성의 요소가 가미되어 서로의 연계 관계가 높은 점도 존재하였다.

여하튼 복잡다난한 나의 초등시절은 포항에서 영천, 대구로 이어졌고 그로 인해 그 정체성이 복잡했다. 그리고 도시와 농촌을 오가며 여러 친구들을 만났고, 그 때 모습을 회상하면 너무나 다정다감한 추억들도 많았다. 시골에 가면 도회지의 아이로 도시에 오면 시골을 아는 아이로 여러 감성을 가지기도 했다. 이렇게 나는 조금은 다른 환경과 문화를 느끼며 자랐고, 다양한 친구들과 관계를 가지고 지금의 모습으로 여기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