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병희의 세상읽기]
윤석렬대통령이 8·15 광복절 특별사면 및 복권과 관련해 본격적으로 숙고에 들어갔다는 소식이다. 경제위기 극복과 국민통합차원에서 대규모 사면(복권)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듣던 중 반가운 뉴스다.
사면은 대통령의 비상한 결단이 필요한 고도의 통치행위다. 사법부에 의한 법률적 판단 대상이나 사법심사권의 적용 범위에서도 제외된다. 실정법 위반자를 정상으로 돌려 놓는 것이기에 대통령으로서는 그만큼 부담도 크고 정치적 리스크를 안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사면은 흔히 정치영역과 법률의 교차점에서 결정된다고 한다. 헌법재판소가 2000년 사면법 관련 헌법소원을 심리하며 “사면권은 전통적으로 국가원수에 부여된 고유한 은사권이다. 법이념과 다른 이념과의 갈등을 조정하고,법이념의 정의와 합목적성을 조화시키기 위한 제도로도 파악되고 있다”고 밝힌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통치행위로서 사면과 관련해 국가지도자로서의 결단과 역량을 보여준 대표적 인물이 세종대왕이다.
신선같은 흰 수염에 인자한 미소의 노(老)정승 황희, ‘청백리’의 대명사이자 국가적 사표(師表)로 조선초기 명재상이었던 그는 사실 청렴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비리로 얼룩진 인물이었다.
조선왕조실록 황희졸기(卒記)에 따르면 “성품이 지나치게 관대해 제가(齊家)에 단점이 있으며 청렴결백한 지조가 모자라서 비판을 받았다” “매관매직에 형옥을 팔아 뇌물을 챙겼다” “친한 사람을 주로 추천하는 등 인사에 공정하지 못했다”는 등 청탁과 관련한 다수의 비리가 나온다.
대사헌때(세종7년)는 남원부사로부터 유지로 만든 값비싼 안롱(鞍籠)을 받았다가 자수했고, 좌의정때는 살인사건을 저지른 사위를 위해 요로에 로비를 하다가 투옥됐고, 그런가 하면은 공공용지를 공짜로 불하받으려다 들통이 나 망신을 당했고, 두 아들의 비리를 적극 옹호하기도 했다.
오죽하면 실록은 “뇌물이 폭주했으며 한 이랑의 밭이나 한 사람의 노복까지도 탐하고 다투어서 여러 번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을까?
이처럼 당대 최고의 경제사범, 당대 최고의 권력비리, 당 최고의 문제의 인물을 태종과 세종은 파면과 사면(복직)을 반복해가며 19년간이나 영의정에 보임, 조선 최고의 명재상으로 우대를 했을까?
이조 병조 형조 예조 공조 등 육조 판서(장관)을 모두 거치는 등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탁월한 행정능력과 조정력 덕분이다. 조선초기 나라의 기틀을 잡고, 개혁과 혁신에 국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던 태종과 세종에게 황희는 말많고 탈많은 의정원(행정부)의 실무 총괄자로서 최적의 인물이었다. 게다가 직언까지 서슴지 않아, 만에 하나 있을 수 있는 군주의 실수나 실책을 미연에 막았다. 세종에게 수시로 들이대는 것은 아예 일상이었다. 세종의 참신한 아이디어가 자칫 백성들의 현실과 크게 어긋날까 봐 황희는 ‘만약의 경우’를 지적하며 속도조절에 나섰고, 세종은 이를 진지하게 참고했다.
탁월한 지도자였던 세종은 마음을 열어 놓고 황희의 이런 직언을 경청했으며, 또한 그를 앞세워 수많은 신하와 유림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글창제, 측우기, 혼천의 제작 등 문화과학기술 문명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저마다 제 각각의 의견을 내는 신하들을 “너도 옳고 너도 맞다”는 식으로 조율 조정하는 중재능력은 군주에게는 최고의 충성이 됐다.
실용적인 측면에서 세종은 이런 황희의 능력을 높이 사 조정의 완강한 반대와 정치적 부담에도 불구하고 영의정으로 삼았던 것이다. 실제 영의정 내정이후 10여일 동안 반대상소가 그치지 않자 임명이 늦춰지기도 했다. 황희 본인도 내정 취소를 요청했지만, 세종은 관료사회의 왕권훼손(탄핵)을 무릅쓰고, 임명을 강행했다. 조선이 절대군주의 정치체제였지만 내용상 관료중심의 신민(臣民) 사회였다는 사실을 모를리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백성을 위해, 나라를 위해, 그리고 자신의 정책적 이상실현을 위해 모험을 선택했다.
지금으로 치면 고도의 통치행위를 결정했던 셈이다.
2022년 7월 대통령 취임을 갓 두 달 막 넘긴 현 싯점에서 윤석렬 대통령은 사면과 관련해 어떤 결정을 할까?
윤대통령은 세종의 길을 걸을까? 아니면 문재인 전 대통령식의 면피성 선택을 할까?
윤대통령이 진정으로 국민의 안위를 생각한다면 이번 사면의 기준을 변덕스러운 여론이나 정치적 상징성 보다는 세종대왕처럼 실질적 ‘효용성’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국민들이 매일 피부로 느낄 정도로 날로 심화되고 있는 미증유의 경제난과 불안한 국제정세를 감안할 때 민생과 실물경제 회복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는 얘기다.
더욱 압축한다면, 경제사범을 사회로 복귀시켜 다시 한번 기회를 주는데 이번 사면의 의미를 두어야 하며, 특히 기업콘트럴 타워인 총수들을 자유스럽게 해주는 것에 신경을 집중해야 한다.
위험에 처한 한국경제의 유일한 돌파구는 기업인들의 창의와 혁신이다. 글로벌 기업들이 사활을 걸고 격전을 벌이는 전쟁터에서 리더십의 부재는 기업 경쟁력에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밖에 없다.
지금은 기업인의 역할이 더욱 절박한 상황이다. 위기 극복을 위해 기업인들이 전력을 다해 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 기업인들이 적극적인 투자와 일자리 창출에 나설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사실 기업을 경영하다 보면 자칫 법 테두리를 벗어나기 십상인 경우가 있다. 세금이나 노동, 외환관계법 위반 등은 정부에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얽어넣을 수가 있다. 과거 정부에 밉보인 기업치고 살아남은 기업이 없다는 것이 이를 반증하고 있는 것 아닌가.
대표적 희생자가 이재용삼성부회장이다. 그가 무엇이 아쉬워 최순실에게 말을 사주었겠는가? 삼성이 그리 만만한 동네 구멍가게였던가? 반도체 하나로 대한민국경제를 먹여 살리는 세계최고의 기업이 아닌가? 국제적 회계기준에서 보아도 잘못이 없고, 죄목 자체도 희한하기 짝이 없는 혐의를 이것 저것 끌어대 5년내내 발목을 잡아 놓았으니 그 큰 손실은 누가 책임져야 하나? 오는 29일 형기를 채우는 대로 (향후)5년내 취업금지 등의 갖가지 제한이 즉시 해소돼야 하는 복권조치가 이뤄져야 하는 이유다.
태광의 이호진 전 회장은 또 어떤가? 아라미드라는 세계 최고의 기능성 첨단섬유를 개발해 놓고도 패권자로서 국제무대를 휩쓸지 못하는 것은 현장에서의 기민하고도 과감한 판단력, 즉 오너 리더십의 부재(不在)때문이 아닌가?
CJ엔터테인먼트 못지 않게 일찍 한국 콘텐츠산업을 선도했으면서도 중도에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것 또한 리더십의 인위적 제한 때문아니었던가?
이호진 전 회장은 특히 검찰의 과잉수사 논란과 함께 황색저널리즘의 마녀사냥식 희생양 찾기 놀이의 제물이었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해당기업의 그 막대한 손실, 국민과 국가의 피해는 누가 보전해 줄 것인가?
더구나 지난해 10월 형집행이 만료됐음에도 이런저런 법률조항을 핑계로 경영참여를 제한하고 있는 바, 이 또한 이중처벌이 아닌가? 즉시 복권조치가 이뤄져야 하는 이유다.
사정은 조금 다르지만 신동빈롯데회장이나 동국제강 부영건설 등 법률상 활동에 제약을 받고 있는 다수의 기업인들도 마찬가지다.
기업총수들에게 걸핏하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대는 배임문제만 해도 그렇다. 배임은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의 지적처럼 경제사범으로 형사처벌을 하는 나라가 거의 없다. 벌금이나 과태료 등 경제벌로 다스려 활동의 제약을 최소화하는게 일반적이다. 한국적 가중처벌의 왜곡된 여론몰이에 기업총수들이 애꿎게 나가 떨어지고 있는 셈이다.
윤석렬대통령은 눈치 볼 필요가 없다. 오로지 국익에 도움이 되냐, 되지 않느냐를 판단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진정성을 갖고 통치행위로서 결정을 하면 이를 마다할 국민은 없다.
세종대왕이 개혁 혁신 군주로 지금까지 추앙 받을 수 있었던 것도 통치행위를 통해 ‘황희’라는 문제가 많지만 역량있는 인사를 행정수반으로 과감하게 중용한 덕분이다.
윤석렬대통령은 과연 불멸의 지도자로 대한민국민들에게 추앙을 받고 있는 세종대왕의 길을 걸을것인가? 5년 뒤 소리없이 사라지는 지도자가 될 것인가?
답은 윤대통령 본인에게 있다.
<필자 소개>
-전 동아일보 모스크바특파원, 산업부장, 부국장, 미래전략연구소장
-전 채널A 경영전략본부장, 글로벌사업센터장
-전 에너지경제신문사장, 아주경제신문부문대표
-전 (주)메디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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