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경신문=박은정 칼럼니스트]

'공(空)한 자리'

가을이 끝나갑니다.
비에 젖은 낙엽 하나 주워봅니다.
한 때 나무에서 푸르름을 자랑하며 내게 생기를 주던
의미 있던 존재였겠지요.

젊음을 만끽할 때 무시했던 불교 경전의 말이 떠오릅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보이는 물질이 실상은 비어 있다니요!
생로병사의 인간이 고통을 잊고자 절규하는 소리같이 
들릴 때도 있었습니다.
 
엄마의 무릎에서 벗어났다고 좋아하면서 갈아탔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이윽고 내릴 역이 가까이 다가와도
어쩌면 우리는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생겨난 것은 모두 소멸한다>는 것을.

인생의 완성은 바라는 것이 줄어드는 것과 비례한다는데
물질의 위대한 힘에 익숙된 우리는 아직도
<공수래 공수거>의 ‘텅빈 고요’에 머물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먼저 이승에서의 이별을 선포한 자가 가버린
저 ‘먼 곳’을 쾡한 눈으로 쳐다보면서 남겨진 자는
대기에 울려퍼지는 비가(悲歌) 속에서 견디기 힘든 공허함을
탄식하고 있습니다.

 

           '먼 곳'
                                          -문태준(1970~)

      오늘은 이별의 말이 공중에 꽉 차 있다
      나는 이별의 말을 한 웅큼, 한 웅큼, 호흡한다
      먼 곳이 생겨난다
      나를 조금조금 밀어내며 먼 곳이 생겨난다
      새로 돋은 첫 잎과 그 입술과 부끄러워하는 
      붉은 뺨과 눈
      웃음을 가져가겠다고 했다
      대기는 살얼음판 같은 가슴을 세워 들고 
      내 앞을 지나간다
      나목은 다 벗고 바위는 돌 그림자의 먹빛을 거느리고
      갈 데 없는 벤치는 종일 누구도 앉힌 적이 없는 몸으로
      한 곳에 앉아 있다
      손은 떨리고 눈언저리는 젖고 말문은 막혔다
      모두가 이별을 말할 때
      먼 곳은 생겨난다
      헤아려 내다볼 수 없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