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경신문=임윤희 기자] 2년 넘게 멈춰 있던 삼성전자 평택 5공장(P5)이 다시 움직인다. AI 메모리 슈퍼사이클을 겨냥한 ‘승부수’다. 정체와 방치의 상징이던 P5가 차세대 메모리와 파운드리를 아우르는 전략 거점으로 복귀하면서 삼성의 투자 기조도 공격 모드로 전환됐다는 평가다.

삼성전자 HBM3E 12단 D램 (사진=삼성전자)

26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최근 임시 경영위원회를 열고 경기도 평택캠퍼스 2단지 5라인(P5) 골조 공사 재개와 2028년 본격 가동 계획을 확정했다. 지난해 1월 공사 중단 이후 2년 동안 사실상 ‘셧다운’ 상태였던 P5가 공식적으로 재가동 궤도에 오른 셈이다.​

P5는 메모리 업황 급랭 속에 터닦기만 마친 뒤 자재와 설비가 현장에 장기간 쌓여 부식 우려려가 나올 정도로 방치돼 왔다. 이달 중순 평택 현장에서 칼럼 등 자재 반출 시연이 이뤄지고 협력사 장비 점검과 승인 절차가 진행되면서 공사가 다시 돌기 시작했다는 기류가 현장에 확산됐다. 업계에서는 P5가 가로 600m 안팎, 3층 구조의 ‘3층 팹’으로 설계돼 기존 평택 4공장보다 클린룸 수와 생산능력이 크게 확대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번 재가동 배경에는 AI 확산이 촉발한 메모리 슈퍼사이클 기대감이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이다. 데이터센터와 AI 서버용 HBM, 고대역폭 D램 수요가 향후 수년간 급증할 것이란 전망이 이어지면서 AI 메모리 패권을 선점하려는 움직임이 투자 전략과 라인 증설 결정에 그대로 반영됐다.

노근창 현대차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삼성전자가 AI 인프라 시장의 수혜를 가장 많이 받을 것 같다”며 “HBM에서 어려움이 있었는데 새로운 판로가 확대되고 있는 국면”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TSMC 의존도가 높았던 글로벌 고객들이 공급망 다변화 차원에서 한국 기업으로 일부 수요를 이동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삼성은 P5에 60조~80조원 규모 투자를 투입해 HBM4, 1c D램 등 차세대 AI용 메모리 생산을 우선 배치하고, 이후 수요에 따라 일부 공정을 시스템 반도체·파운드리로 전환하는 ‘복합 팹’ 구성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메모리와 파운드리를 한 캠퍼스에 묶어두면 고객사 요구에 맞춰 공정을 전환하고 신제품을 올리는 속도를 높일 수 있어 AI 칩 턴어라운드에 유리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삼성의 투자 철학인 셸 퍼스트 전략도 다시 주목받고 있다. 반도체 업계 1위 TSMC은 고객 주문과 장기계약에 맞춰 증설 속도를 조절하는 수주형 방식이다. 반면 삼성은 공장을 먼저 지은 뒤 수요를 채우는 선제 투자를 공식화해 왔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삼성이 평택을 비롯한 주요 거점에서 셸 퍼스트 전략을 고수하는 건 메모리·파운드리를 함께 키우는 복합 구조 때문”이라며 “TSMC처럼 ‘주문 받으면 짓는’ 방식으로는 AI 서버·HBM 수요 폭증 속도를 따라가기 어렵기 때문에 공장을 먼저 깔고 수요를 채우는 쪽에 더 무게를 두는 것”이라고 말했다.​

증권가에서는 AI 초호황에 진입한 것으로 판단하며 기대감을 한층 키우는 분위기다.

HBM이 불러온 공급 부족 현상은 D램, 낸드플래시까지 번지고 있다. 메모리 업체들이 수익성이 높은 HBM에 집중하면서 전 제품군 가격이 동반 상승하고 있어서다. 증권가는 올해 4분기 D램 수요가 공급의 3배 수준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흐름이 내년 하반기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AI 메모리 ‘공급자 우위’ 국면이 길어질수록 P5를 앞세운 삼성전자의 공격 투자도 한층 힘을 얻을 것이란 관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