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시간의 흐름을 아쉬워하며 철없던 시절을 떠올리면 너무나 그립고 보고픈 친구들이 많다.
그 중에서도 같은 중·고등학교를 함께 다녔던 자그마한 덩치에 빡빡 깎은 머리가 눈부시게 하얗던 명석한 한 친구가 있었다. 그는 남다른 집중력과 차분한 성격을 가졌고, 옅은 미소에 항상 진지했던 모습과 표정이 기억에 또렷이 남아있다.
새하얗고 똘망똘망한 눈매와 까랑까랑한 목소리에 특히 공부를 잘하는 그가 나는 항상 부러웠고 친하고 싶었다. 하지만 학년에 10반이나 있었고 콩나물시루 같이 많은 동기가 700명이 넘어 중학교 때는 같은 반이 한 번도 되지 않아서 특별한 친교를 가지진 못했다. 나도 나름 공부를 좀 하긴 한 것 같았지만 이런 저런 상황과 이유로 집중력이 미흡했고, 가까운 친구들의 유혹과 의리가 나를 더 기쁘게 했기에 즐겁게 놀기만 좋았던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철없이 마냥 즐겁기만 했던 중학교를 떠나 더욱 거리가 멀어진 고등학교를 가게 되었고 실망스러움에 힘이 빠져 참석한 입학식에서 그 친구를 다시 보게 되었다. 물론 많이 친하지 못해 서로를 잘 알지는 못했고, 그저 같은 중학교 출신이라는 것만 알아 먼 발치에서 서로는 눈인사만 나누었다. 그렇게 시작한 고등학교 생활은 중학교 때와 다르게 친구의 중요성을 조금은 더 깊이 알고 또 다른 추억을 만들어갔다.
여전히 중학교 때처럼 많은 숫자의 동기생들이 있었던 고등학교에서도 같은 반이 되지 못했던 그와 나는 복도를 오가며 가끔 안녕하는 인사 정도만 나누는 사이로 지냈다. 물론 중학교 때보다는 좀 더 친근하게 서로의 이야기도 나눴고 안부는 전하며 서로의 시간을 보냈지만, 더 깊은 나눔을 가지진 못했다.
그 후 대학도 다르게 진학해 그는 문리과, 나는 기계과를 선택하며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되어 더욱 기억에서 멀어졌다. 나는 대학 진학과 군 입대와 전역, 복학을 거쳐 과학자가 아닌 치열한 경쟁의 삶을 향한 취업의 과정을 거쳐 갔다. 10여년의 시간 동안 친구들보다는 사회라는 울타리와 경쟁의 벽을 넘기 위해 정신없이 바빴으며 새로운 만남으로 또 다른 영역을 만들어 갔다.
그 이후 약간의 여유와 스스로 세상을 개척해 갈 수 있는 힘이 자라나, 지난 시간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고등학교 졸업 20주년을 기념해 동기들과 만남이 이루어졌다. 모두들 더 좋은 세상을 누리려고 더 높은 기회를 향해 뛰기만 했던 시간에 묻혀 지내다 오랜만에 반갑게 만났다. 아름답고 행복했던 추억의 그 고교시절을 찾으려 겨우 짬을 내서 올 수 있었던 모임은 너무나 유쾌했고 과거를 기억해 내기에 분주했다.
가물가물했던 추억의 시간을 다시금 일깨우며 누가 더 많은 기억을 가졌는지를 키 재기하듯이 서로를 찾고 안부를 주고받는 시간이었다. 변화된 모습에 도전과 실패를 자랑도 하며 새로운 관계를 맺고자 서로의 현실과 미래를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리고 모든 동기가 함께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참석하지 않은 친구들의 모습을 그리며 궁금함을 풀어 보았다.
나도 그 때 그 친구가 그리웠고 보고 싶어 어떻게 변했는지 상상하며, 주변 친구들에 물어보았는데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가 번잡하고 세속적인 세상을 떠나 구도자의 수행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이다. 출가를 하여 불교경전 화엄경을 탐구하는 스님으로 계시며, 넓고 깊은 부처의 세계를 찾고 계시다는 것이다. 물론 그가 남다른 진리를 추구하며 이상의 실현에 뜻을 가지고 있음이 보이긴 했으나 그렇게 속세를 떠나 구도의 길을 걷고 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가끔 뜻 없이 교회나 사찰을 가서 성자들의 뜻을 전하는 성직자들의 말씀을 들으며 나의 모습을 바라보긴 했다. 하지만 현실의 세상에 존재하는 나 만을 생각했으며 오직 위안을 받기만 했을 정도였다. 믿음도 크게 가지지 못했지만 구도자의 길은 상상도 해본 적이 없어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중고시절 집중력이 낮았고 그냥 즐거움으로 지나쳐갔지만, 총명하고 또렷한 모습의 그 친구가 구도자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에 그저 멍할 뿐이었다.
스님의 법명은 정법이라 했다. 정법이란 법명은 막연히 그와 너무나 어울린다는 느낌을 주었고, 지금 그의 모습을 그려본다. 중·고등학교 6년 시절에 스님과 한 번도 같은 반이 되어 보지는 못했지만, 정직하고 강직한 모습의 까까머리에 유난히 맑은 빛의 눈매와 미소가 기억이 난다. 자주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짧은 말에도 따스함이 묻어 있었고, 일반 생활에서도 정확하고 절제하는 느낌이 남아 있다. 지금도 여전히 변함없는 모습에 더 맑고 선한 눈매와 당찬 목소리를 들려주며 더 큰 세상을 열어 가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다시 볼 수 있다면, 친하고 싶었으며 부러워했던 그가 아닌 스님으로 보고 느낄 수 있을까? 40년을 넘은 시간이 바꿔 놓은 다른 길의 만남은 어떠할까? 나는 출가의 의미와 구도자의 삶을 정확히 모른다. 그저 가출이나 알고 욕되지 않게 살려 발버둥치는 정도이다. 꿈에서도 그려보지 못한 구도의 수행자 길은 어떤 것이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마도 어설픈 세상을 밝고 이롭게 이끌며 스님이 찾고자 하는 의미의 길을 걷고 있을 것이라 상상한다.
뜨겁게 식지 않을 것 같았던 여름이 지나고 선선하고 뽀송뽀송한 날씨가 생기 차게 해주는 어느 날 스님을 만나 뵐 수 있다는 소식이 왔다. 40년을 훌쩍 넘어 다시 만날 정법 스님의 모습을 그리며 온갖 상상을 다 해본다. 그리고 나는 스님께 한번 안아 보고 싶다 할 것이다. 그리고 스님의 느낌과 향을 맡고 싶다. 잠시의 여유를 가지고 정화하고 싶은 내 욕심을 채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