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 조선업계로 부터 낭보가 있었다. 한국조선해양이 총 6,749억원 규모의 LNG선 2척 건조를 그리스 선사인 캐피탈가스(Capital Gas)로부터 수주했다는 소식이었다. 현대삼호중공업이 만들어 2027년 3월 31일까지 인도한다. 캐피탈가스는 올 1월에도 한국조선해양에 17만4000㎥급 LNG선 2척을 발주한 바 있다. 현대중공업에서 건조하며 척 당 2억5300만달러였다.
뉴스가치가 있음에도 이를 보도한 곳은 인터넷매체 몇 곳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 같은 날 주요 일간지와 지상파 방송들은 6.25당시 튀르키예군이 중공군을 물리친 것을 기념,경기도 용인시 김량장동 일대를 ‘튀르키예의 길’로 명명한다는 소식을 주요 기사로 일제히 다뤘다.
22개 유엔참전국 중 프랑스 이탈리아 등 보다 훨씬 많은 5,000여명의 전투병력을 보내 200여 명 이상의 희생자를 낸 나라. (당시 그리스 인구가 750만 명이었음을 감안하면 상당한 규모의 병력이다.)
70년대 초, 한국의 현대적 조선기술이 초보단계였을 때 흔쾌히 설계 기술협력을 해주고, 심지어 선박건조 주문까지 했던 나라.
인류정신문화의 발상지로서 유구한 역사와 문화, 빈번한 외세(사라센, 오스만터키 등)의 침입과 장기간 식민지, 독립전쟁, 근대들어 군사정(왕정)과 민주화세력 간의 대립,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세력간의 대립 등 우리와 닮아도 너무 닮은 꼴의 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의 오랜 앙숙이자 가상의 적인 튀르키예에 대해서는 ‘형제의 나라’ ‘혈맹’으로 살갑게 대하면서도 깊고도 깊은 관계를 맺어 온 그리스에 대해 한국 언론은 왜 이리 인색할까?
나는 이 묘한 상황을 연출해 내고 있는 우리 자신이 궁금해졌다. 그리스와 한국은 어떤 관계인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투기디데스, 헤로도투스, 히포크라테스, 아테네민주주의, 스파르타, 펠로폰네소스전쟁, 페르시아전쟁, 마라톤, 살라미스해전, 로고스전투, 비잔틴제국, 오스만터키, 독립전쟁, 시인 바이런의 참전, 쿠베르뎅남작과 올림픽게임 등등 그리스와 관련해 알고 있는 지식들을 나열해 봤지만, 정작 한국과 관련해 아는 게 뚜렷이 떠오르지 않았다.
궁금증을 풀기 위해 벼르고 벼르던 끝에 마침내 주한 그리대사관의 상무관을 만날 기회를 얻었다. 30일 오후 서울 중구 장교동 주한 그리스대사관에서 그를 만났다.
법학도 출신으로 판사보를 10여년 지낸 경륜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실제 콘스탄티노스 다스칼로풀로스(Konstantinos Daskalopoulos) 상무관의 설명은 논리적이면서도 열정적이었다.
“가장 큰 원인은 지리적인 거리였다고 봅니다. 일단 멀지 않습니까? 또 그리스-한국의 관계는 이미 깊숙이 발전해왔는데 대중에 알려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양국은 서로를 필요로 하는 단계까지 성숙했습니다. 서로가 닮은 공통점도 많고요. 아울러 줌 화상회의 등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이제는 지리적 거리의 한계도 큰 문제가 되지 않고 있지 않은가요?”
예를 들어 그리스는 유네스코의 지원아래 문화유적의 발굴과 보존, 그리고 해외 반출 문화재의 그리스로의 귀환에 힘을 쏟아 왔는 바, 한국도 비슷하지 않느냐는 말로 시작했다. 이와 관련해 그리스의 경험은 한국에 많은 도움을 주어 왔으며 앞으로 그럴 것이고 양국의 협력 관계 또한 이미 상당한 정도에까지 와 있다는 설명이다.
또 국제정치적 측면에서도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그리스-한국은 이해관계를 같이 하고 있다는 견해다. 러시아를 지지하고 있는 튀르키예와는 달리 그리스는 EU회원국으로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반대하고 있으며 우크라이나의 자유와 안전을 지지하고 있는 바, 이는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하고 있는 한국과도 같은 노선이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특히 “그리스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개최를 준비하면서 전기 도로 경기장 등 인프라스트럭쳐 건설 투자에 따른 후유증(부담)과 유로존 가입에 따른 여파 등으로 2008년 금융위기를 겪었지만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과 프로그램 아래 빠르게 회복, 2021년 GDP 6.6% 등 지금은 EU내 어느 나라보다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 중”이라며 “한국과의 경제협력 기회는 얼마든지 열려 있다”고 강조했다. 실제 그리스는 IMF구제금융 프로그램을 예정보다 2년 앞당긴 지난해 3월 끝냈다.
선박 건조 등 조선해운에 주로 집중된 현재의 양국 교역 상황을 얼마든지 물류 에너지 등 다른 분야로 확대할 수 있으며, 이미 많은 분야에서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어 경제협력의 미래 역시 낙관적이라는 것이다.
아시아 아프리카를 유럽으로 잇는 관문으로서 그리스의 지정학적 잇점도 한국의 EU시장 진출에 대단히 유리한 경쟁력 포인트이며 한국 기업들은 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설명이다.
이와 함께 EU가 그리스에게 제공하는 2,700억 유로 규모의 국가 결속 프로그램도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는데, 그리스 정부는 이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그린에너지, 환경, 첨단신기술, 교통, 스마트시티 분야의 혁신 개발 프로젝트를 추진 중인 바 한국 기업들에게 참여의 문이 열려 있다고 전했다. 간단히 줄여 말해 이들 분야에서 한국기업들의 합작사업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미국과 중국의 대립 갈등 사이에서 선택을 압박(강요) 받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그리스의 역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한국은 반도체를 비롯한 산업교역에서 두 강대국의 대립으로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는 바, 그리스를 교두보로 해 EU는 물론이고 기타 지역으로의 시장확대를 꾀할 수 있다는 논리다.
그러면서 그는 다시한번 조선업이외 분야의 경제협력 확대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리스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 미국 등과 경제 교류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외 제3지역 중에는 주로 중동 국가들과 경제 교류가 많았다. 한국과도 선박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교류를 이어왔다. 작년에 그리스 선주들은 한국 조선소에서 배를 건조했는데, 한국 조선소에서 건조된 신규 선박의 약 35%가 그리스 선주 회사에서 온 것이다. 그렇지만 경제 교류는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것이기 때문에 양국 기업이 원하는 분야가 있다면 최선을 다해 연결하려고 한다. 선박 건조이외에도 합작 사업 등을 통해 재생에너지, 물류, 건설 등으로 확대되기를 바란다.”
다스칼로풀로스 상무관의 말대로 그리스는 지리적으로 한국인에게는 아직 먼 나라다. 아직까지도 양국 항공사는 정규 직항 노선을 운영하고 있지 않아 중간 경유지를 이용해야 하며, 비행시간 만으로도 12시간 이상이 소요되는 멀고도 먼 나라다.
지난해 9월 상무관으로 부임한 그는 이런 난점을 극복하기 위해 직항 노선 개설에 집중한 끝에 드디어 대한항공 임직원 3명이 4월초 아테네를 방문해 현장 실사를 하는 등 오는 6월 직항 정기 노선 개설을 목표로 분주히 뛰고 있다.
다스칼로풀로스 상무관은 초임 외교관으로 시카고 주재 상무관시절, 시카고와 그리스에 직항 노선이 없어 시카고 거주하는 그리스인들의 모국 방문에 많은 비용과 시간을 들여야 하는 어려움을 보고 직항 노선개설을 추진해 성과를 이끌어 낸데 이어 아르메니아에서도 같은 프로젝트를 성공한 바 있어 직항 노선 개설의 전문가인 셈이다.
그리스 문화관광산업에의 기여를 의식한 노력임은 물론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그리스 인구는 1100만 명인데, 매년 1300만 명의 외국인 관광객이 찾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3500만 명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 문화유적지에 대한 단순 관광에서부터 소포클래스의 비극과 20여개의 사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체험하기까지 한 차원 높은 문화여행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2500여개의 섬과 훌륭한 지중해식 요리와 음식, 청정 수역과 탁월한 기후 등도 경쟁력 높은 관광 자원이다.
예컨대 크레타 섬 등에서 재배하는 채소와 과일류는 품질이 좋아 상당량이 유럽으로 수출되고 있으며, 심지어 뉴질랜드 회사들은 키위를 이들 섬에서 재배해 역시 유럽으로 수출할 정도라는 것.
아쉽게도 한국인들에게는 몇몇 곳만 잘 알려져 있는데, 알려지지 않은 지역들 중에 정말로 가볼만하며 훌륭한 곳이 무척 많다는 설명이다.
다스칼로풀로스 상무관은 이어 "우리는 그동안 많은 시간을 아깝게 흘려 보냈다”면서 한국과의 관계를 더 일찍 시작하지 못한 것에 아쉬움이 있지만, 이제 부터라도 교류와 협력의 폭을 넓혀 나가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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