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수 이더랩 대표

한때 ‘AI’라는 단어는 미래를 상징하는 마법의 키워드였다. 챗GPT와 생성형 이미지, 음성 합성 기술이 등장했을 때, 세상은 놀라움과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기업들은 앞 다투어 ‘AI 전환’을 선언했고, 투자자는 그 이름만으로도 신뢰를 보냈다.

2025년 현재, 그 열기는 서서히 식어가고 있다. 소비자는 AI가 주는 효율보다 피로를 더 크게 느끼고, 기업은 ‘AI를 썼다’는 이유만으로 신뢰를 얻지 못한다. 이것은 단순한 기술 피로가 아니라, ‘AI 포화 시대’라는 새로운 국면이다. 모든 곳에 AI가 넘쳐나는 과잉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광고를 켜면 AI 모델이 등장하고, 유튜브에는 AI 음성이 흐른다. SNS에는 ‘AI가 만든 얼굴’, ‘AI가 요약한 뉴스’, ‘AI가 추천한 제품’이 넘쳐난다.

2024년 닐슨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2%가 “AI 기반 콘텐츠가 너무 많아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답했다. 사람들은 ‘AI가 만든 정보’보다 ‘사람이 직접 말하는 경험’을 더 신뢰한다. 이는 기술의 한계가 아니라, 과잉 노출이 만들어낸 감정적 피로의 결과다.

소비자는 이제 AI가 제안하는 데이터보다 인간이 느끼고 경험으로 말하는 콘텐츠를 원한다. 기술이 아닌 ‘이야기’와 ‘감정’이 그리워진 것이다.

AI 피로가 가장 먼저 드러난 곳은 광고·마케팅 산업이다. 브랜드들은 AI 카피라이터, AI 모델, AI 음성 더빙 등 자동화 솔루션으로 효율을 높였다. 그 결과, 메시지는 반복되고 감정의 온도는 사라졌다.

중국 바이두의 AI 모델 루안루안은 실제 광고 모델로 계약을 따내며 화제를 모았지만 “표정이 너무 완벽해 감정이 없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AI가 효율을 높였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감정 없는 광고’는 소비자의 신뢰를 얻지 못한다.

결국 마케팅의 핵심은 ‘AI를 얼마나 많이 쓰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적정하게 쓰느냐’로 옮겨가고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AI 포화의 본질은 기술 과잉이 아니다. 그 밑에는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무너진 신뢰의 위기가 있다.

AI가 만든 뉴스, 후기, 이미지가 쏟아지면서 소비자는 이제 모든 것을 의심한다. 보는 사람들은 “이 문장은 사람의 손으로 쓴 것일까?” “이 영상 속 인물은 실제 존재할까?”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이 같은 불신은 브랜드의 신뢰 자산을 흔들고 있다. MIT 테크놀로지 리뷰는 이 현상을 ‘신뢰 인플레이션’이라 분석했다.
AI 콘텐츠가 넘쳐날수록, 소비자는 ‘인간의 흔적’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한다. 기술이 많아질수록 인간의 진정성은 희소해지는 역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최근 기업들은 앞다투어 ‘AI 솔루션’을 내세운다. 그러나 그중 상당수는 실제로는 단순 자동화 프로그램이거나 미완성 기술이다. 이른바 ‘AI 워싱’, 즉 AI인 척하는 마케팅이다. AI 워싱은 단기적 관심을 끌지만, 장기적으로는 신뢰를 무너뜨린다.

소비자는 “AI라더니 별 게 없네”라고 실망하고, AI 전체에 대한 신뢰까지 잃는다. 이는 과거 ESG 워싱과 같은 패턴이다. 결국 진짜 AI를 구별하는 것이 시대의 과제가 되었다. 기술의 유무가 아니라, AI를 통해 얼마나 사람에게 ‘의미 있는 경험’을 제공하느냐가 경쟁력을 결정한다.

이제는 AI를 많이 쓰는 기업보다, 잘 쓰는 기업이 살아남는다. 적정한 AI 활용은 기술의 양이 아니라 맥락과 목적의 명확성에서 출발한다. AI 카피를 쓰더라도 마지막 문장은 사람이 감정적으로 다듬고, AI 챗봇을 운영하더라도 상담의 마무리를 사람이 직접 해야 한다. 그 작은 온기가 신뢰를 만든다.

“이 문제는 정말 AI로 풀어야 하는가?”

기업이 던져야 할 질문은 단 하나다. 이 질문을 던질 줄 아는 기업만이 효율성의 함정을 피하고, 신뢰 기반의 혁신을 만들 수 있다. AI 포화 시대의 진정한 혁신은 인간으로의 회귀다.
AI의 확장이 아니라, AI의 성숙이 필요하다.

기술의 총량이 아니라 인간 중심의 균형이 피로를 넘어서는 새로운 경쟁력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