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더랩 김경수 대표

가상자산 시장에서 가장 주목받는 영역 중 하나가 바로 스테이블코인이다. 스테이블코인은 이름 그대로 가격 안정성을 담보하기 위해 달러나 금과 같은 실물 자산 혹은 국채와 같은 안전 자산에 연동된다. 이 때문에 비트코인처럼 가격이 크게 출렁이지 않고, 결제나 송금 수단으로 활용도가 높다.

비트코인이 ‘디지털 금’으로 불리며 가치 저장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한다면 스테이블코인은 ‘디지털 달러’로서 실질적인 교환 매개체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기술적 혁신을 넘어 화폐 시스템의 근본적 변화를 의미한다.

최근 트럼프 전 대통령의 아들들이 가상자산 사업에 뛰어들면서 미국 정치권과 금융권에서는 ‘만약 트럼프 가문이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라는 가상 시나리오가 떠오르고 있다. 이는 단순한 가족 기업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스테이블코인이란 곧 화폐 권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정치인이나 특정 집단이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한다는 것은 사실상 민간 화폐를 창조하는 것과 같다. 역사적으로 화폐 발행권은 국가의 고유 권한이었지만 디지털 기술은 이러한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만약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개인이나 집단이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한다면 그 투명성과 독립성에 대한 의문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화폐는 중립적이어야 하고, 특정 정치적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워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스테이블코인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먼저 달러의 역사를 떠올려 보자. 초창기 달러는 단순한 종이 증서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뒤에는 금이 있었다. 언제든지 달러를 금으로 바꿀 수 있다는 신뢰가 있었기에, 사람들은 달러를 화폐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스테이블코인도 마찬가지다. 이름만 ‘스테이블’인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실제로 무엇을 담보로 하고 있느냐가 핵심이다. 만약 달러나 국채와 같은 안전한 자산이 충분히 준비금으로 쌓여 있다면 이는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금본위제’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담보가 불투명하거나 허구적이라면 그것은 결코 안정된 화폐라 할 수 없다.

스테이블코인의 가치는 결국 신뢰에서 나온다. 발행자가 약속한 담보 자산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언제든지 교환이 가능한지에 대한 투명한 공개와 검증이 필수적이다. 이것이 바로 테더나 USDC코인 같은 주요 스테이블코인들이 정기적으로 감사 보고서를 공개하는 이유다.

투명성이 보장되지 않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이미 여러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2022년, 테라LUNA와 테라USD의 붕괴는 대표적인 사례다. 알고리즘 기반으로 운영되던 UST는 담보 자산 없이 LUNA 코인의 발행량 조절을 통해 1달러 페그를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결국 신뢰가 무너지면서 단 6일 만에 1개당 10만원에 달하던 LUNA가 1원도 안 되는 수준으로 추락했다.

스테이블코인이 가져온 혁신은 분명하다. 24시간 언제든지, 국경을 넘나들며 저렴한 비용으로 송금할 수 있는 시스템은 기존 금융 시스템의 한계를 극복하는 솔루션이다. 하지만 이러한 혁신이 금융 시스템의 안정성을 해치거나 소비자를 위험에 빠뜨린다면 그 가치는 반감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정부와 규제 기관의 역할은 혁신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투명하고 공정한 규칙을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스테이블코인 발행자들에게 충분한 준비금 보유를 의무화하고 정기적인 감사와 공시를 요구하며 소비자 보호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그 핵심이다.

스테이블코인의 투명성이 담보되려면 관리감독과 감시가 철저하게 작용해야 한다. 테라 UST의 붕괴와 코나아이의 자금 유용 사례는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빈틈이 너무 많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특히 스테이블코인처럼 많은 사람들의 자금이 집중되는 시스템에서는 투명성 부족이 곧바로 대규모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

규제 당국은 단순히 규칙을 만드는 것을 넘어서 실제로 그 규칙이 지켜지고 있는지를 실시간으로 감시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담보 자산의 실시간 공개, 독립적인 제3자 감사 기관의 정기 점검, 그리고 문제 발생 시 즉시 대응할 수 있는 위기관리 시스템이 필수적이다.

스테이블코인은 단순한 기술적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화폐 시스템의 근본적 변화를 상징하며, 새로운 형태의 권력 구조를 만들어 낼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시대에서 중요한 것은 혁신과 안정성, 효율성과 안전성 사이의 균형을 찾는 것이다.

트럼프 가문의 암호화폐 진출이 제기한 가상의 시나리오는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디지털 시대의 화폐는 누가, 어떤 원칙하에 발행해야 하는가? 그 답을 찾는 과정에서 우리는 더 나은 금융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