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성칼럼] 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적 없다. 세월호 5주기

-반생명은 생명을 이기지 못한다.

김재성 주필 승인 2019.04.17 10:06 의견 15
 


[한국정경신문=김재성주필] <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 지난 14일 내가 다니는 교회 예배당 전면에 내건 주제어다.

지난 2014년 4월 16일. 별이 되어 올라 간 304명의 꽃들을 기억하는 예배였다. 세월 호 참사가 일어났던 5년 전 이맘 때 교회 입구에 내걸었던 <기억 하겠습니다>라는 약속을 확인하는 말이기도 하다. 

벌써 5주기. 

올해도 전국 곳곳에서 추모행사가 줄을 이었다. 여전히 주제는 ‘기억’이다. ‘네이버’와 ‘다음’의 추모게시판 역시 ‘잊지 않겠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로 도배를 했다. 단원고등학교가 있는 경기도교육청도 4월 한 달을 ‘노란 리본의 달’로 지정했다.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노란 리본’은 1973년에 토니 올랜도와 돈이 발표한 '오래된 참나무에 노란 리본을 달아주세요'(Tie a Yellow Ribbon Round the Ole Oak Tree')라는 팝송에서 유래되었다. 노래의 배경 스토리에는 애절한 ‘무사 귀환’의 염원이 담겨있다. 

우리나라에서는 2007년 8월, 참여연대, 평화여성회 등 78개 단체가 광화문 미국 대사관 인근 정보통신부 앞에서 아프간 피랍자들의 무사귀환 호소문을 발표하고 '노란 리본 달기' 캠페인을 시작한 것이 노란 리본 등장의 효시였다. 

세월호 노란리본도 처음에는 304명의 무사귀환을 비는 마음이었다. 그러던 것이 시간이 지나 이들의 생존가능성이 희박해지자 애도와 분노, 항의의 리본으로 바뀌었다. 누리꾼들은 SNS 얼굴사진에 노란 리본을 넣었고 옷깃 아니면 책가방, 핸드백, 배낭, 승용차의 유리창에 개나리꽃처럼 노란 리본을 달았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노란 리본의 기적에 불을 댕겼다. 참사가 일어난 그 해 8월 14일부터 4박 5일, 방한기간 내내 가슴에 노란 리본을 달았다. 교황의 노란 리본은 리본의 의미를 생명운동으로 확장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그 절정은 교황이 떠난 후에 알려진 후일담이었다. 누군가가 “중립의 의미로 리본을 떼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하자 즉답일성,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 교황의 이 한마디는 유가족과 그들을 후원하고 애도하는 다수국민의 가슴에 위안과 용기, 희망의 바람을 불어 넣었다. 그 한마디는 대한민국의 영성을 고양시키고 중생의 눈을 열어 주었다.   

어떤 사람은 묻는다. “부모도 3년 상인데 5년이 넘도록 상장(喪章 노란리본)을 다는가? 아니면 첫 사랑이냐? 잊지 못하게”  

‘그’나 ‘나’나 세상잡사에 감성이 무뎌져 생명의 외경을 모르고 산다. 지구가 우주의 빅뱅이라는 한 사건에서 비롯되었듯이 지구에 사는 뭇 생명은 탯줄에 나왔든 알에서 나왔든 다 연기(緣起)로 이어진 한 몸인 것을 느끼지 못한다. 

세월호 참사는 그 바탕의 인명경시 풍조도 문제지만 사고 후 대통령 이하 대통령 쪽 사람들의 언행이 생명경시의 극치를 보여 준 것이 더 문제였다. 당시 7시간 대통령의 행적은 그렇다 치고 기껏 한다는 짓이 당분간 외부인과 단절이 필요 하다는 의사의 소견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다 잃고 혼자 살아남은 어린이를 찾아가 보듬는 장면을 TV에 내 보내고, 가짜 실종자 가족을 동원해 대통령과 껴안는 장면을 연출해 놓고 여론조사 수치를 점검했다.   

“시체장사” “국민 미개” “가난한 집 아이들이 배는 왜 타가지고..” “좌파냐” 운운의 막말, 단식 유가족들 앞에서 피자와 치킨을 먹는 막행은 ‘노란 리본’을 ‘국민운동’으로 확산시킨 마파람이 되었다. 

4월은 부활의 달이다. 4월에 별이 된 꽃들은 "씨알은 죽지 않는다“는 함석헌 선생의 말씀을 증명해 주었다. 그리고 반생명은 생명을 이기지 못한다는 역사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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