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집에서는 귀한 몸이다"..금융권 직원 절반 이상 점심 걸러

장원주 기자 승인 2019.01.17 16:23 의견 0
(자료=한국노동사회연구소)


[한국정경신문=장원주 기자] #1. 1987년 7월 울산에서는 현대자동차를 포함한 여러 공장에서 노조설립 요구가 분출했다. 소위 '87년 789 노동자 대투쟁'이 시작됐다. 노조 설립의 단초를 연 것은 군부독재 정권의 '장발 단속'이었다. 신체의 자유에 해당하는 기본권을 정권의 사주를 받은 회사가 두발 단속을 하는 데 대한 문제의식이 노조 설립 요구로 이어진 것이다.

#2. 지난 8일 국민은행노조가 19년 만에 파업에 돌입했다. 다른 요구사항들에 묻혔지만 노조의 주요한 요구 가운데 하나는 점심시간 1시간 보장이었다. '밥 먹을 권리조차 빼앗기고 있다'는 금융권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파업 사유의 하나로 등장한 것이다. 은행 창구직원 A씨는 "고객의 불편함을 앞세운 회사의 요구에 그동안 항의 한 번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참아왔다"며 "배가 고파도, 요의를 느껴도 항상 인내를 강요하는 문화를 더는 수용하기 어렵다"고 성토했다.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기본권에 대한 사회적 요구는 하나의 문화를 바꾸는 시발점이 됐다. 금융권 직원 절반 이상이 점심을 거른 적 있다는 여론조사는 파업의 사유가 됐다. 관행을 당연시하는 기존 질서를 깨뜨린다는 점에서 향후 금융권 노사관계 변화의 신호탄이 됐다는 분석이다.

17일 금융경제연구소의 '은행직원 점심시간 이용에 관한 실태조사 및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전국 33개 금융기관 직원 1만8039명을 상대로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설문조사한 결과 금융권 직원 평균 52.6%가 고객응대 업무로 인해 점심을 거른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개인고객 대면업무 집단이 평균 68.9%로 가장 높고, 영업점 및 지점 집단이 65%로 10명 중 6명은 점심식사를 거르는 경험을 했다.

특히 은행권이 평균 56.1%로 비은행권보다 높았으며, 영업점 및 지점에 근무하는 직원들의 고객응대 업무 로 인해 점심을 거르는 비율이 본점에 비하여 약 17.2%포인트 더 높았다.

33개 금융기관 중 "업무로 인해 점심식사를 거르거나 늦은 적이 있다"는 응답은 4대 시중은행이 모두 속했다. 더욱이 고객응대 업무로 인해 점심시간을 이용하지 못하는 횟수는 1주일 평균 1.9회로 나타났으며, 특히 개인고객 대면업무를 담당하는 직원들이 1주일 평균 2회로 타 업무 집단에 비해 더 높게 나타났다.

이로 인해 금융기관 직원들 가운데 75.1%는 소화기계 질환(만성 소화불량, 역류성 식도염, 위염, 기능성 위장장애, 지방간, 담석 등)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소화기 계통 질환을 진단 받았지만 치료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는 응답이 27%(4842명)로 가장 높았다.

우리나라 사망원인별 직업별 사망자 수 통계를 보면 2017년 기준 전체 사망자의 7.7%가 소화기계통의 질환으로 인해 사망했다. 금융기관 직원들이 속하는 서비스 및 판매 종사자와 관리자의 사망 비율이 전체의 9.4%에 해당된다. 이는 무직 및 단순 노무 종사자를 제외하면 소화기계 질환으로 인한 사망률이 가장 높은 직업군이라 할 수 있다.

금융경제연구소 강다연 연구위원은 "금융기관 직원들의 불규칙한 점심식사와 과중한 업무 부담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소화기 계통 질환 발병 위험이 매우 크다"며 "더욱 심각한 것은 해당 질환을 진단받고도 적절한 치료를 적시에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해외 은행의 경우 프랑스 은행은 오후 12시부터 2시까지 일괄적으로 은행 문을 닫는다. 이탈리아는 오후 1시30분부터 2시30분까지, 독일과 벨기에 은행은 오후 1시부터 2시까지 직원들의 점심시간이 보장된다. 미국 은행은 점심시간이 따로 있지 않지만 은행 폐점시간이 오후 3시에서 6시 사이로 다르게 운영되고 있고, 일본은행들은 오후 3시에 폐점한다. 중국 은행은 개인업무와 기업업무에 따라 다지만 직원들의 점심시간 1시간이 보편적으로 보장되어 있다.

강 연구위원은 인터넷뱅킹 등 비대면 서비스 증가 등을 감안하면 점심시간 1시간 보장 요구가 무리하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다. 2018년 6월 말 기준 국내은행의 인터넷뱅킹 고객은 1억4067만명이며 인터넷뱅킹을 통한 계좌조회, 자금이체, 대출신청 서비스 이용건수는 전분기 대비 7.5% 증가했다. 전체 인터넷뱅킹 이용 가운데 모바일 뱅킹이 차지하는 비중은 63%에 이른다. 반면 은행지점 방문을 통한 창구 서비스를 이용하는 비율은 8.8%에 불과하다.

강 연구위원은 "급변하는 금융시장 환경 속에서 은행직원들의 1시간 점심시간 사용은 정말로 무리한 요구안이 되는 것인지, 기존 은행 서비스 문화와 직원들의 노동 기본권에 대한 인식 변화가 필요한 시기가 다가온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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