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성 칼럼] 까치는 희소식을 전하지 않는다.

김재성 주필 승인 2019.01.02 11:38 | 최종 수정 2019.03.27 12:57 의견 5

[한국정경신문 김재성 주필] 새 해 아침, 까치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전자 연하장 착신을 알리는 카톡 신호음이 하루 종일 울렸다. 세태가 각박해졌어도 신년 덕담은 여전해서 ‘복 많이 받으시라.’는 축원을 많이 받았다. 달라진 것은 최근에는 어느 위인의 지혜가 담긴 에피소드가 많다. 복도 좋지만 지혜가 소중하다는 인식이 생기는 것 같다.   

복은 돈, 지위, 명예를 말한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내 바깥의 조건이기 때문에 항구적이지 않다. 뿌리가 욕망에 있으므로 만족이 없고 가져도 불안하다. 반면에 지혜는 내가 터득한 것이어서 절대적으로 내 안에 있다. 쓰면 더 깊어지고 쓰면 더 밝아진다. 지혜가 있으면 복을 지을 수도 있고 복이 없어도 행복을 누릴 줄  안다. 

그런데 복과 지혜를 남이 나에게 줄 수 있는 것인가? 특히 지혜는 영양주사처럼 주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면에서 성숙해 새가 알을 깨고 나오듯이 보고 듣는 것이 새로운 세상일 때 참 지혜를 얻었다 할 수 있다.  
성인은 스승이 없다. 설사 스승이 지혜를 준다 해도 그것은 지혜로 가는 동기나 방법은 될지언정 그 자체로 지혜가 될 수 없다. 지혜의 씨앗은 만인에게 파종된 것이어서 각자 자기 씨앗을 싹틔우는 것이지 남의 씨앗이 내 안에 들어와 싹 틀수 없는 노릇이다.

범 기독교의 성인으로 추앙받는 아우구스티누스(354~430)가 계시를 받아 성경(* 참조)을 펼쳐 읽고 회심한 사건은 서양사의 한 획을 긋는 대 역사다. 그런데 그가 들었던 ‘집어서 읽으라’(Tolle lege)는 음성은 실은 이웃집 아이들이 놀이하면서 부른 노래였다. 영혼이 무르익어 들을 준비가 된 사람에게는 바람소리 물소리도 신의 음성이고 구원의 메시지일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는 사건이다.  

진리의 이치가 양의 동서라고 다를까? 서산대사(1520~1604)는 85세 때 남원 성을 지나다가 닭 우는 소리를 듣고 활연 대오, <지금 닭 우는 소리 들으니/ 대장부 할 일 마쳤다.>는 오도송(**참조)을 남겼다. 닭 우는 소리에 무슨 메시지가 있을까마는 다 익은 과일이 나뭇잎 부딪치는 소리에 떨어졌을 뿐이다.      

“깨어 있는 눈으로 보라” 영화 ‘국가 부도의 날’ 마지막 내러티브는 진리다. 영화의 맥락에서 이 말은 권력과 자본의 농간에 속지 않을 안목을 가지라는 뜻이지만 참으로 깨어있으면 설사 속더라도 낙심하지 않는다. 부도가 나서 망하든 감옥을 가든 스스로 부끄럽지 않으면 그 뿐, 묵연히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물은 흘러도 물속의 달은 그 자리에 있듯이 깨어 있는 사람은 바깥 변화에 휩쓸리지 않는다. 살아서 숨 쉬고 흰 구름 푸른 산을 보면서 ‘좋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이 축복이고 그 나머지는 덤으로 여기면 그 뿐, 분주하고 시끄러울 일이 없다. 

<종일토록 봄을 찾아 헤맸으나 만나지 못하고/짚신 닳도록 구름 낀 먼 산을 헤맸네./돌아오는 길에 문득 매화향기 맡으니/봄은 가지 끝에 이미 와 있었네.>(***참조)
행복은 내 안에 있다. 깨어있는 사람, 지혜로운 사람은 남의 시선을 위해 살지 않는다. 상대적 빈곤으로 불행하지도 않고 비교우위로 행복해 하지도 않는다. 오직 삶과 생명의 참된 가치를 탐구할 뿐이다. 삶 그 자체를 깨달음을 위한 만행으로 여기니 까치 소리를 기다릴 이유가 없다.     
 
* 로마서 13장 :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 白髮心非白 古人曾漏洩 今聞一鷄聲  丈夫能事畢.
*** 唐詩 : 終日尋春不見春 芒鞋踏破嶺頭雲 歸來却拈梅花嗅 春在枝頭已十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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