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성 칼럼] 외교관의 말과 예의

김재성 주필 승인 2018.12.11 10:49 의견 5

[한국정경신문 김재성 주필] <우리는 합의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외교 화법을 설명할 때 자주 인용되는 예문이다. 결론은 같은데 “결렬됐다”는 것보다 한결 부드럽지 않은가? 이처럼 부정적 어휘를 피하는 것은 외교화법의 기본이다. 이를테면 두 정상의 협상결과 <우리는 원칙에 합의했다>고 발표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합의된 것이 없다는 뜻이다. 세부사항은 진전된 것이 없지만 협상실패라고 말하지 않고 합의라는 원칙만 강조하는 것이다.  
외교의 완곡어법은 16세기 절대왕정시대에 시작됐다. 말 한마디가 전쟁으로 이어지는 사례가 생기자 자연발생적으로 단정적이고 부정적인 말을 피하게 되었고 이 화법이 젠틀맨의 격조로 자리 잡았다.  

동양에서는 일찍이 기원 전 춘추시대에 시로 말하고 시로 화답하는 화법이 정착했다. 그 우아한 전통은 지금까지 남아 94년 3월 중국 외교부장 첸지천은 김영삼 대통령이 북한 핵의 심각성을 말하자 남송시대 육유(陸遊)의 시로 답을 대신했다.<산 막히고 물 끊겨 길이 없는가 싶더니, 버들잎 푸르고 복숭아 꽃 화사한 마을이 보이네 山窮水盡疑無路 柳暗花明又一村> 또 시진핑(習近平) 중국 주석은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멀리 천리를 보려고 다시 한 층 위로 올랐다欲窮千里目 更上一層樓>는 당나라 왕지환의 시를 읊고 이를 족자로 만들어 선물했다.(2013년 3월)   

그런 점에서 12월 5일 독일의 동북아 담당 고위 외교관이 한독친선협회 회장 이상민 의원(4선 대전 유성구)을 만나 주고받은 대담은 격조도 없고 예의도 없는 최악의 대담으로 꼽힌다. 보도된 대담내용을 그대로 옮겨보자.

“독일은 햇볕정책의 원조국가 아닌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덕담 한마디 못해 주느냐” 
“비핵화는 유럽연합(EU)의 보편적이고 일관된 요구다. 할 일은 안 하는 북한에 채찍을 내려놓을 수는 없다” 
“제재를 조금 풀어주면 북한도 협상의 효용을 인정해 비핵화에 나설지 모르지 않느냐?” 
“북한을 믿는가? 국제사회가 북한에 속은 게 한 두 번이냐? 위험한 나라다. 비핵화의 진전이 없는 마당에 제재완화는 안 된다” 
“그래도 평화를 위해서라면 뭐라도 해야 하지 않느냐” 
“북한은 미국보다 유럽에 더 가깝다. 그들의 미사일이 유럽에 더 큰 위협이다. 더 드릴 말씀이 없다.바빠서 이만 가보겠다.”

이 대화의 본론은 그대로 두고 서두와 결론만 외교적 화법으로 바꿔보면 “햇볕정책 원조국이자 분단을 극복한 독일국민을 존경한다. 그 지혜와 경험을 배우고 싶다” “한국정부의 비핵화 노력을 높이 평가한다.”는 덕담을 주고 받는 것으로 시작해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원칙은 변함이 없다.”는 결론으로 끝나야 한다. 

독일은 2014년부터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산하 대북제재위원회 의장국이 된다. 이를 감안하면 이번에 온 외교관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은 정해져 있다. 이상민 의원의 미숙은 바로 이 지점이다. 상대방이 왜 오는지 파악도 안하고 마치 피감기관의 장을 접견하는 어투로 서두를 꺼냈으니 처음부터 꼬였던 것이다. 

그렇더라도 독일 외교관의 태도는 너무 오만했다. 외교관다운 품위도 없었다. 그의 말대로 북한 핵이 미국보다 유럽에 더 위험하다면 한국은 그 몇 백배 더 위험하다. 때문에 더 절실하다. 거기다 우리는 핏줄이다. 

국민 입장에서 보면 이상민 의원이 못할 말을 한 것도 아니다. 어떻게 우리가 국제사회 하는 대로 따라 가면서 시누이처럼 말리는 척만 할 수 있는가? 더 아쉬운 것은 이상민 의원이 했던 말은 한국 언론이 해야 하는 질문이었다. '면박을 당했느니 어쨌느니' 뒷 담화만 할 게 아니라.